어버이날이면 항상 무슨 선물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한다. 나이가 들수록 더 고민이 되는 것 같다. 회사를 다닐 때는 별생각 없이 용돈을 보내드리곤 했는데 이제는 그것도 뭔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올해도 뭘 선물드릴까 고민하다 결국 흔하디 흔하지만 봄여름 사이 입으실 수 있는 티셔츠를 하나씩 샀다. 그러다 문득 SNS에 올라온 책 소개 하나를 보고 엄마에게는 책을 한 권 보내드리면 좋겠다 싶었다.
'이어령 교수의 마지막 수업'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정확한 엄마의 취향.
그 어느 해 엄마가 말했다.
“나 이어령 좋아하잖아.”
미국에 계신 이모가 한국에 잠시 들어왔다고 엄마는 이모를 만나러 대전에 가겠다 하셨다. 마침 스페인 출국을 준비하며 회사를 그만두고 쉬던 때라 아빠 일로 잠시 머물고 계신 김천으로 내려와 엄마를 모시고 대전으로 다시 올라갔다. 젊은 날에는 혼자 이곳저곳 잘도 다니시던 대담함이 있으셨을 텐데 부쩍 연세가 드시며 혼자 다니는 걸 겁내 하셨다. 차라도 있어서 모시러 가서 모시고 오고 하는 편리함을 딸이 해주면 좋았겠지만 그때 엄마의 딸은 무궁화호로 엄마를 모시고, 대전지하철로 갈아타고, 또 조금 걸어서 이모가 계시는 외삼촌 댁에 도착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미국으로 가셔서 전혀 나의 기억에 없는 이모와 엄마. 그 만남은 참 어색했다. 엄마가 언니인데도 이모의 기는 대단히 세 보였다 .
하룻밤을 자고 점심때쯤 외삼촌댁을 나와 엄마와 커피숍에서 잠시 수다를 떨었다. 커피값이 너무 비싸다며 그렇게 돈 써서 외국 나가 어떻게 살려느냐고 엄마는 야단을 치셨다. 엄마와 단둘이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처음이었고, 그렇게 마주 앉은자리에서 나는 처음 알았다.
엄마가 중학교에 바로 들어가지 못해 큰 외삼촌이 형편 좋아지면 보내주겠다며 사준 중학교 전과를 일 년 동안 달달달 모두 외었었다는 것을.. 대학에 너무 가고 싶었지만 동생 뒷바라지를 한다고 대학을 포기하고 일을 하며 참 서러워했었다는 것을.. 그것이 엄마의 한이었고, 그렇게 엄마는 접고 접은 꿈들이 참 많았다는 것을.. 오랜만에 본 동생이 반가우면서도 엄마는 새삼 젊은 날의 기억이 억울하기도 한 것 같았다.
그날 대전역에서 김천으로 가는 표를 끊고 기다리는 동안 서점에 들렀다.
"엄마, 읽고 싶은 책 없어?"
한참을 책을 둘러보시던 엄마가 '이거!'라며 드신 책은 이어령의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이었다.
"왜 이 책이 읽고 싶어?"
"신문에 소개 나온 거 봤다. 그리고 내가 본래 이어령 에세이를 좋아했어"
엄마는 이어령 교수의 에세이를 좋아했었구나.. 그때 처음 알았다.
책을 사드리고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엄마는 예전에 읽었다는 에세이 하나를 이야기해주셨다.
"어릴 때 길을 가다 바나나 장수를 만났는데.
바나나 장수가 팔다 남은 바나나를 한 다발 주었지.
아이는 너무 행복해 바나나를 가득 안고 길을 가는데 이게 너무 많으니까 자꾸 떨어지는 거야.
하나를 주우면 또 하나가 떨어지고, 또 주우면 또 하나가 떨어지고..
날을 덥고, 바나나는 자꾸 떨어지고... 아이는 짜증이 나기 시작한 거야.
길은 멀고 그냥 바나나를 나중에는 줍지도 않고 집에 왔는데 와서 보니 바나나는 거의 다 길에 떨어뜨리고 남은 바나나도 햇빛에 다 물러버린 거야..
행복도 이와 같다는 거지. 한꺼번에 너무 많이 주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은 행복의 참맛을 모른다는.. 만약 바나나 장수가 아이에게 바나나 하나만 주었더라면 그냥 그 걸 감사하며 맛있게 먹을 수 있었을 텐데... “
바나나 장수이야기에 이어 네 잎 클로버 이야기도 해주시는 엄마는 딸에게가 아닌 친구에게 말하는 듯 들떠 보였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취향 하나를 알게 되었다.
내 취향대로 고른 부모님의 옷 위에 정확한 엄마의 취향 책 한 권을 같이 넣어 손 엽서를 써서 선물을 보냈다. 다음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옷도 잘 입고, 책도 잘 읽을게. 어떻게 알았어? 엄마 이어령 교수 좋아하잖아”
“알지 엄마. 그래서 보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