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상실과 사랑

상실을 기록하며 사랑을 기억하는 일

by 로하

여권 만기일이 얼마 남지 않은 걸 발견했다. 벌써 10년이 지났다.

강산이 변한다는 시간이 이렇게 빨리빨리 도달하는 시간임을 느낀지는 꽤 되었다. 년 초 지인이 새해 선물로 10년 다이어리를 주었을 때도 조금 움찔했다. 만약 20대나 30대에 그 선물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50대의 나에게는 10년 후는 차마 기대가 되지 않는, 기다리고 싶지 않은 숫자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굳이 이 다이어리를 쓰며 매일 10년 후의 나를 그려야하는 걸까.라는 회의가 들었다. 다이어리의 시작에 쓰인 ‘10년 후의 나에게’쓰는 글을 적는 페이지는 영영 채우고 싶지 않았다.


만기가 다가오는 여권을 바꾼 2016년은 스페인에서 5년을 살고 한국에 다시 돌아온 해였다. 세 번째 여권이었다. 갱신을 하며 과연 몇 번이나 여행을 더 하게 될까에 대한 기대나 바람이 크게 없었다. 그래서 별 고민없이 얇은 여권으로 신청을 했다. 역시나 10년동안 세 번의 흔적을 남기고 거의 새 것인 채로 유효기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생애 첫 여권은 2004년 생애 첫 해외여행을 위해 만들었다. 지금은 지역 구청에서 쉽게 신청을 할 수 있지만 그때는 여권 담당하는 곳이 몇 군데 정해져 있었고 기간도 꽤 오래 걸렸다. 당시 나에게 ‘여권’의 의미는 내 삶의 공간과 경험을 무한히 확장시키는 가능성의 열쇠였다. 마치 운전면허증을 손에 쥘 때처럼 당장 차를 몰고 도로에 나가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전 국토가 나의 손아귀에 잡힌 듯한 벅참, 그것이 세계지도로 넓어지는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첫 여권이 차곡차곡 수많은 타국의 비자와 도장들로 채워질수록 뿌듯함과 설레임도 더 커져갔다. 다음 여행을 기약하며 여권을 만지작 거리고 지나온 여행의 흔적을 곱씹던 마음이 떠오른다. 그렇게 첫 여권은 잦은 여행으로 유효기간을 미처 채우지 못하고 훼손되어 두 번째 여권으로 옮겨갔다. 두 번째도 못지 않게 여러 여정의 흔적을 가득 담았다. 게다가 스페인에서의 5년 살이로 이어졌고 그 덕에 해외살이 이방인과 여행자 사이를 오가는 시간을 고스란히 남겼다.

나에게 여권의 존재감이 변화한 것은 세 번째부터였다. 새로운 지도로 나아가는 열쇠로의 설레임은 사라졌다. 시간이 되면 연장해야하는 카드처럼 의례적으로 연장해두는 서류 이상은 아니다. 그러니 네번 째 여권도 마찬가지였다. 약간의 기대감이 있었다면 새로 바뀐 예쁜 디자인이라는 점 정도였달까. 네번의 여권 만드는 동안 한번도 마음에 들어본 적이없는 10년의 시간을 증명해야 하는 최신 여권 사진을 새로 찍고 한결 단순해진 신청 절차와 짧아진 기간을 거쳐 다시 손에 쥔 새로운 여권을 들었을 때 문득 생각했다.

‘이 여권에서 내가 잃은 것은 뭔가?’


“나이 때문에”

최근 몇년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를 할때면 유난히 ‘상실’에 대한 주제가 자주 등장한다. 건강, 기억력, 기회, 흥미, 사람 등. 잃는 것이 많은 우리가 쉽게 찾는 답은 ‘나이 때문에’다. 하지만 모든 상실의 이유를 나이로 몰아가는 것은 다분히 편리하고도 허무한 귀결이 아닌가.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부르던 20대 후반이었던 우리는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는 문장의 의미를 이제야 비로소 삶의 문장으로 만난다. 대학 교정에서 읽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의 배경은 지금의 시간에 붙이기에 가장 적절한 제목이 아닐까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을 잃고 있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의 상실인지를 마주하지 않은 채 막연한 아쉬움과 허허로움을 토로하고 있지는 않을까.

‘상실감’은 다른 의미로는 무언가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실의 시대 이전 사랑의 시대가 있었다는 말이다. 한 번도 쓰지 않은 듯 말끔한 여권의 시대 이전 유효기간도 못채우고 폐기되어야 했던 너덜너덜 여권의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상실을 들여다보는 일은 어쩌면 나의 사랑을 다시 기억하는 일이다.

무엇을 잃었나. 정말 잃었나. 다른 모습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네 번째 여권을 받아든 날 문득 그 질문에 답을 해보고 싶어졌다. 이 글은 상실에 대한 기록과 사랑에 대한 기억 그 사이 어디즈음이 될 예정이다. 무엇이 남을지는 모르겠다. 새로운 여권에 어느 여정의 도장이 찍힐지 지금은 알 수 없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