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고, 사랑했고..

나의 첫 덕질을 기억하며

by 로하

대학로의 작은 소극장 로비에 잔뜩 상기된 내가 있었다. 7년 동안 좋아한 가수의 콘서트를 처음으로 보는 날이었다. 공연 시작 입장을 혼자 기다리며 텔레비전으로만 보던 가수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시디로만 듣던 노래를 라이브로 마주한다는 것에 얼마나 설레었던가. 무대가 밝아지고 드디어 등장한 가수의 모습이 얼마나 신기했던가. 한없이 정적이고 고요하게 이어지는 공연에서 <길> <새> <언젠가는> 노래를 얼마나 소심하게 따라 불렀던가.


이상은의 팬이었다(혹은 ‘이다’) 1988년 여름, 중학교 방학 어느 날,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그녀를 보고 적잖이 놀랐다. 노래에 반했다기보다는 그저 자유롭고 신나있는 한 사람의 모습에 끌렸다. 한껏 경직되어 있던, 막 사춘기에 접어들던, 지극히 재미없고 지루한 청소년이었던 나는 처음으로 내가 아닌 세계를 동경하게 되었다.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전국이 ‘담다디’ 열풍일 때 나도 동참했다. 평소에는 잘 보지 않던 텔레비전과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을 보고 듣고, 하이틴 잡지의 표지를 살펴 기사를 읽었다. 시골에 살던 내가 딱히 덕질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은 그 외에는 별로 없었다. 어쩌면 딱 그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덕후 기질의 최선이었을 수도 있다.

좀 더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소비하고 결정할 수 있을 때는 카세트 테이프나 CD 앨범을 샀고, 서울에 올라와서는 공연을 찾아보았다. 꽤 오래, 꾸준히 한 마음으로 이어온 사랑이었다. 고등학교, 대학교, 사회 생활 초창기에 만난 친구들은 내가 그녀의 팬인 것을 안다. 가뭄에 콩나듯 어딘가에서 그녀의 소식을 들을 때면 내 생각이 났다는 핑계로 오랜만에 안부문자를 보내는 친구들이 여전히 있으니 당시 얼마나 티를 내고 사랑했었는지 가늠할 수 있으리라.

이 생애 첫 덕질은 나의 삶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본래 사랑하면 닮게 되어 있으니까. 혹은 닮기 위해 사랑하니까. 담다디를 불렀던 그녀의 시원시원한 자유로움을 동경한 덕에 온전한 자유는 아니어도 언저리 정도를 흉내내며 떠도는 사람이 되었다. 그녀가 유학을 가고 그림을 그리고, 해외 활동을 하고 음악의 결이 완전히 바뀌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선택을 하며 나아갈 때 나 역시 정해져있는 길이 아닌 다른 선택지를 탐닉했다. 그 과정 안에 때때로 마주하게 되는 막연함과 불안함도 그녀의 노래를 삶의 배경음악 삼아 다독였다. 당시 나를 나로 만들어 간 수많은 요인들이 있겠지만 그 사랑의 지분이 결코 적지 않았다.


사랑하는 마음의 상실은 어느 한 순간에 오지는 않았다. 서서히 삶에 필요한 메시지가 바뀌고, 한동안 나란히 가던 걸음을 자주 놓치고 함께 걷지 않는 구간이 길어졌다. 그러다가 2019년 오랜만에 30주년 기념 겸 새 앨범 발매 콘서트에 갔다. 가수의 30년 기념은 꽤 많은 팬들의 30년이기도 했기에 콘서트 장에는 나처럼 30년의 시간을 함께한 팬들이 많았다. 어쩌면 오래전 대학로 한 소극장에 함께였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 중 누군가는 그리움으로, 누군가는 아쉬움으로, 혹은 여전히 새로운 설레임으로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그 공연을 나오며 생각했다. 이제 사랑의 시간은 지났다고.

그리고 작년 오랜만에 단독 콘서트 소식이 SNS에 올라왔다. 이전 같으면 아마 망설임없이 티켓팅을 했겠지만 그때는 망설임없이 티켓팅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느 다른 가수의 공연 소식을 보는 마음과 같았다는 말은 아니다. 여전한 반가움은 가득하지만 굳이 약속을 잡아 만나는 마음을 할애할 정도의 설레임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 잠깐이지만 별 미련이 없는 스스로의 마음이 좀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한 사랑하는 마음의 상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나됨’에 그 사랑의 지분이 적지 않았다고 했듯 쉽게 상실될 수 없는 부분으로 ‘지금의 나’에 존재하는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흔적은 이미 ‘나’이기에 함부로 잃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이상은의 팬이다. 여전히 그녀의 소식이 들려오면 반갑고 반가울 것이므로. 심장이 쿵쾅되지는 않겠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평화로이 기껍고 반가울 것이므로.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흔해만 보였네' <언젠가는.의 가사는 20대 콘서트장에서보다는 지금에서야 내 문장으로 읊조려지는 가사이므로...

오랜만에 이 글을 쓰며 옛 앨범 리스트를 보니 한동안 듣지 않았던 노래들이 반가워 리스트에 넣고 다시 들었다. 지금만큼은 그녀의 음악이 배경음악으로 딱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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