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 번째 언어-스페인어로 살다 #에필로그
다른 나라에서 사는 일중 가장 일상과 다른 것이 있다면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말하고 읽고 듣는 일이 더 이상 자연스러운 무의식의 일이 아니라 노동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언어를 쓰는가 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바꾼다.
예를 들어 스페인어는 동사가 먼저 나오는 언어이다. 한국어는 ‘끝까지 들어야 의미를 안다’고 하지만 스페인어는 그 반대인 셈이다. 이렇다 보니 스페인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을 듣다 보면 상대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자기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이미 결론이 다 나온 문장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스페인어를 할 때는 나도 모르게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발견하곤 했다. 한국어를 쓰던 습성 상 이미 결론을 말했으니 빨리 왜 그런 결론을 말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강박이 생겨 마음이 급해지기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뭔가 말을 많이 하고 들은 날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어김없이 잔잔한 가요 발라드를 듣곤 했다. 노래 가사 하나하나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새삼 느끼며 말이다. 종종 지인들이 스페인을 다녀가며 놓아두거나 공수해 준 한글 책들의 주옥같이 섬세한 묘사가 담긴 문장들 역시 쫄깃한 즐거움이었다.
다른 언어를 쓰며 사는 일은 그러했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더라도 뭔가 내 것이 아닌 도구와 방식으로 나의 이야기를 하는 느낌은 손발이 묶인 것 까지는 아니어도 표현의 한계 속에 갇힌다는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스페인에서 가끔 사람들이 나를 내 나이보다 한참을 어리게 봐서 몸 둘 바를 모를 경우가 있었는데 나중에야 그것이 단지 얼굴이 동안 이어서라기보다는 내가 쓰는 언어 수준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종종 '외국에 사는 일은 언어로 회춘을 하는 일'이라며 농담을 하곤 했다.
그렇게 언어로 회춘을 하며, 하지만 또 두 번째 언어로 사는 시간만큼 새로운 나이를 먹으며 한 때 삶의 로망이기도 했던 ‘다른 땅에서 한번 살아보는’ 시간이 끝났다.
많은 스페인어 작별 인사 중 선택된 친구들과 나눈 작별 인사는 “Nos vemos 노스 베모스 (우리 만나자)”였다. 언제를 기약하진 않지만 또 만날 시간을 남겨두는 인사를 할 수 있으니 ‘한번 살아본’것 치고는 꽤 괜찮은 시간이었다.
다시 한국에 돌아온 나에게 그곳의 장소와 사람들은 사라졌지만 ‘나의 두 번째 언어, 스페인어’는 남았다. 그리고 일상의 언어는 바뀌었지만 여전히 나는 스페인어와 잘 지내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