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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하 May 02. 2020

그러니까, 그게 ‘시작’이었네

-내 이름 앞, 어색한 수식어 ‘도예가’의 시작

“도예가예요?”

요즘 나에게 가장 어려운 질문은 이것이다.

작은 작업실에서 도자기를 만들고, 도자기 수업을 하기도 하니 ‘나는 도예가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선뜻 ‘그래요’라는 대답보다는 구구절절 설명이 더 길어진다. 기존의 ‘도예가’라는 단어로 나를 수식하기엔 어색한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어색함은 ‘시작’의 모호함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나는 ‘도예가’가 되려고 무엇을 시작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굳이 시작을 거슬러 찾아보자면 2001년 가을 광화문의 한 극장에서 본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도자기와 영화라니. 게다가 남녀 주인공의 도자기 빚는 장면이 유명한 영화 ‘사랑과 영혼’ 이라면 모를까 뜬금없이 음악 다큐텐터리라니. 너무 억측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랬다. 영화의 초반에 나오는 한 장면, 어느 오랜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낡은 자동차가 쿠바 아바나의 말라콘을 넘어오는 파도를 가르며 유유히 달리는 모습에 나의 시선은 멈추었다. 


‘저런 곳이라면 내 눈으로 꼭 보고 싶다’

그로부터 3년 뒤 회사를 그만두고 쿠바 아바나를 보러 떠났다. 떠난 김에 남미의 다른 땅들도 만나보면 좋겠다 싶었다. 서른이 되어서야 시작한 첫 해외여행 치고는 좀 세지 않느냐고 주변사람들은 말했지만 별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처음이란 다 센, 어떤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그게 ‘도자기’와는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남미 페루의 마추픽추를 오르기 위해 3박 4일 잉카 트레킹을 할 때 같은 팀의 멤버는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독일, 스리랑카 친구들이었다. 그들 모두는 스페인어를 할 줄 알았다. 스페인어라고는 인사말 밖에 모르던 나는 매일 밤 그들의 스페인어 수다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독일 친구가 영어로 가끔 통역을 해주었지만 소외감은 어쩔 수 없었다. 자존심이 꽤나 상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무수한 스페인어 단어 중 가장 많이 들렸던 단어가 있었다.


“도대체 ‘por qué́? (뽀르께)가 뭐야?”

“‘왜?’ 라는 뜻이야. 스페인어에서는 물을 때도 뽀르께(¿por qué́? 왜?), 대답할 때도 뽀르께(porque 왜냐하면)라고 해. 그래서 아마 많이 들릴 거야”


‘그러니까 나는 왜(‘por qué́?) 지금까지 스페인어를 배우지 않았을까?’ 

스페인어 인사말 다음으로 기억하는 첫 스페인어 단어가 만들어낸 질문은 한국에 돌아와 당장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하게 했다. 딱히 무언가를 꿈꾸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5년을 스페인어를 배웠다. 30대 중반이 지나 문득 삶의 쉼표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었을 때 나의 이정표가 자연스럽게 ‘스페인’으로 향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렇게 스페인 세비야로, 길면 2년 정도의 쉼표를 생각하고 떠났다.


그러니까, 그게 ‘도자기’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스페인 세비야의 시간이 익숙해질 즈음 우연히 '이민자를 위한 타일아트 수업' 전단을 보았다. 시내에서 30분 정도 버스로 가야 하는 마을의 문화 센터에서 하는 무료교육이었는데 '이민자'는 아니지만 혹시 기회가 있을까 하여 메일을 보냈고, 선생님으로부터 수업을 들어도 된다는 답장을 받았다. 매주 토요일마다 남미에서 온 이민자 여성들과 함께 타일아트를 배웠다.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선생님이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동네 도예가 선생님의 수업을 같이 들을 생각이 없는지 물어보았고 기왕 30분 버스 타고 간 김에 이것저것 하며 조금 더 머물고 오는 것이 나쁘지 않을 듯해서 선뜻 초대에 응했다. 타일에 장식을 하는 것과는 달리 흙을 만지는 느낌이 참 좋았다. 이렇게 시작된 흙과의 첫 만남은 세비야 예술학교의 세라믹 아트과 2년, 물레과 2년, 4년간의 계획하지 않은 도자기 유학생활로 이어졌다. 2년쯤 이라던 시간은 ‘도자기’와 함께 5년 넘게 이어졌다.


그러니까, 그게 ‘시작’이었네.


문득, 다시 돌아온 서울, ‘정거장’이라는 이름의 작은 공간에서 흙과 스페인, 남미 문화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면 스스로도 종종 낯설다. 한 번도 계획해보지 않은, 그려보지 않은, 그럼에도 되어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어떤 시작은 ‘오늘의 자리’에서야 비로소 뒤늦게 가늠되기도 한다. 정해진 결과를 위한 한 번의 결의에 찬 시작이 아닌 몇 번의 선택들이 모여 하나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나를 남미라는 땅으로 초대했던 선택, 스페인어로 초대했던 질문, 도자기를 삶으로 끌어들인 인연들 중 ‘오늘의 나’와 상관없는 시작은 없다. 그리고 아직 오늘이 완성이 아니니 이 시간이 어떤  내일을 위한 시작일지는 또 한참이 지나서야 눈치 채게 될 것이다. 

어느 노래 가사에 ‘매일 이별하며 산다’고 했던가. 

사실 우리는 매일 시작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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