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일 한 장

스페인에서 도자기를 배우다 1

by 로하

인생 2시즌을 외치며 거창하게 떠나 자리잡은 스페인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 졌을 때 나는 새로운 놀거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동네 문화센터에서그림 그리기 수업을 듣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이미 신청기간이 지났었는데 운 좋게 추가모집 중인 수업이 있었다. 딱히 그림을 배우겠다는 의지보다는 어학원이 아닌 새로운 공간에서 사람들을 만나려는 사심이 더 강했다. 그리고 수업 첫날, 나는 그곳에서 스페인 세비야의 그림 좀 그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 오신 분들의 실력은 수준급이었고, 그분들에게 나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서른 후반의 어른이 아닌 어설프기 그지 없는 어린 아이같이 보였을 것이다. 덕분에 수업내내 어색하게 황송한 보살핌을 받았다.


낯선 나라의 낯선 모임이 어색하지 않게 되었을 때 센터 한 켠에 놓은 광고 전단지들 중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바로 ‘타일아트수업’이었다. 스페인 골목 곳곳에서 만나는 타일장식들이 예뻐서 어디서 배울 곳이 없나 생각하고 있었던 차였기에 더 반가웠다.


‘이민자들을 위한 타일수업’이었고 무려 무료로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정확히 말해 나는 이민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단지에 나와 있는 메일로 문의를 했더니 보낸 메일이 아닌 다른 주소의 메일로 ‘수업에 참여할 수 있다’는 답이 왔다. 메일을 보낸 사람은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이었는데 이름을 보니 스페인사람이 아니라 일본 사람이었다.


수업이 진행되는 센터는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30분 남짓 이동을 해야 하는 베야비스타(bellavista)라는 이름의 마을이었다. 토요일 오전, 여행이 아닌, 무언가를 배우러 도시 외곽으로 나가는 길이 새로웠다. 마치 정말 이곳의 생활인이 된 기분에 마음이 들썩였다.


반가운 웃음으로 맞아주신 끼요코 선생님은 스페인에 산지 20년이 넘었고, 결혼을 해서 남편을 따라 이 마을에 자리 잡았다. 스페인 생활이 오래되었다지만 여전히 그녀의 스페인어에는 일본어의 억양이 묻어있었다. 오랜만에 굳이 한국이 어디인지 설명하지 않아 좋았다.


첫날 선생님은 다양한 사이즈의 타일들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고 나는 욕심껏 조금 큰 사이트의 타일을 골랐다. 건축자재로 이미 무언가 완성되어 있던 타일만 보다가 흙 초벌된 타일을 보니 신기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연필로 선을 그리고 다양한 색을 채워 넣다가 검은 선을 붓으로 그릴 줄 알게 되었다. 있는 패턴을 그리다가 내가 그리고 싶은 것들을 그려 넣기도 했다.

도화지 한 장처럼 타일 한 장은 그렇게 나의 공간이 되어 다양한 것들이 담겼다. 플라멩코를 좋아할 때는 플라멩코 그림이, 스페인어 단어가, 누군가의 선물을 위한 이미지가 담겼다. 한국 지인들이 스페인에 놀러오면 종종 수업에서 만든 타일을 선물하기도 했다.


매주 토요일 외곽마을로 가는 길이 신났고, 그곳에서 남미 이민자 여성들과 함께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타일을 그리는 시간이 좋았다.

그렇게 만난 타일 한 장이 겹겹이 쌓이며 어떤 시간을 담아가고 있는지 그때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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