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추키우기 세트가 품은 마음

대형마트 매장에서 상추를 키워 봅시다

by 토드

신년을 맞아 방 정리를 했다. 그러다 책꽂이 깊숙하게 숨겨진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사 두고 잊은 무언가인가 싶어 꺼내 보았는데, 먼지를 털어내고 나니 로즈마리 키우기 세트였다. 발아기간이 지난 (시중에 판매하는 화분 키우기 세트에는 보통 발아보증기간이 있으며 거의 2년이다) 지 오래였기에 할인스티커가 붙어 있었던 상품이었다. 발아보증기간이 한참이나 지났기에 그냥 버릴까 하다 혹시 몰라 포장을 뜯었다. 흙을 부어 동봉된 화분에 붓고 씨앗을 심었다. 물을 준 후에 집안의 햇빛 잘 드는 곳에 두었다.


근무 당시 내 코너에는 유통기한이 있는 상품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가 전수조사 때 긴장했던 기억이 났다. 다행히 발아보증기간이 넘는 상품이 진열된 것은 없었지만 그 이후 한참이나 화분 코너에서 발아보증기간만 확인하고 다니던 추억도 생각났다.


햇빛을 받는 로즈마리 화분을 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코로나 때 한참이나 홈 가드닝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우리 점포도 좀처럼 나가지 않던 상추 키우기 세트가 있었다.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는 동선에 진열해 두어도 팔리지 않아서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야간근무 중 부점장님이 언뜻 지나가는 투로 입을 열었다.


“너 이게 잘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샘플로 하나 뜯어서 네가 키워야지. 그리고 그걸 진열해 놔. 이게 자라면 이렇게 됩니다, 라고 볼 수 있게. 과정까지 이왕이면 알려 줘. 심은 지 며칠째, 이렇게 적어서.“


당시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 일을 하고 있던 것은 분명했다. 심드렁한 내 반응에 부점장님이 한 마디 더 덧붙였기 떄문이다. 매장은 살아 있어야 하는 거야. 그 말에는 공감했지만 일단 손이 너무 많이 가는 일이었기에 당장 하지는 않았다. 메인 상품도 아니었을 뿐더러 당시 일손이 없어서 진열을 돕기에도 바빴기 때문이다. 마트 현장에서 상추키우기 세트를 팔겠다고 상추를 내가 직접 키울 수는 없었다. 심지어 나는 집에도 화분 하나 두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유독 사람이 없는 야간근무일에 나는 심심해졌다. 여사님들까지 다 퇴근하신 후여서 말동무도 없었다. 밤 아홉 시가 넘은 시간, 조용한 매장에서 나는 상추키우기 세트 하나를 샘플 등록한 후 뜯었다. 처음으로 내가 판매하는 상품의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흙, 화분, 상추 씨앗. 단출한 구성에 상추를 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생각보다 상추씨가 작아서 제대로 심었는지도 의문이었다. 물까지 준 후에 나는 상추키우기 세트가 진열된 통로에 화분을 놓았다. 부점장님이 말한 대로 상추가 자라난 지 0일째, 라는 팻말도 만들어서 세워 놓았다.


“진짜 했네?”


다음날 부점장님은 놀란 듯 내게 말했다. 신기한 것은 상추키우기 세트가 하나둘씩 판매된다는 점이었다. 초록 잎 하나 올라오지 않았는데도 화분 한 개가 고객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갑자기 이상한 책임감이 생겼다. 그렇게 사흘 정도 지났을까. 상추는 자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짧게 고심했지만 길게 고민할 시간은 없어서 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 여사님들이 호들갑을 떨며 내게 사진을 보냈다. 상추가 싹이 났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문제는 광합성이었다. 실내에 있다 보니 화분이 통 햇빛을 받지 못한 것이다. 싹 하나 없는 화분이 안쓰러웠던 여사님들이 해가 날 때는 옥상으로 화분을 옮겨 두었고, 고객들이 몰리는 저녁 시간대에 다시 원상복귀를 시켜 주셨다. 상추가 하나 둘씩 싹이 올라오기 시작하자 상추키우기 세트는 더 잘 팔렸다. 거의 장식처럼 동선에 진열되어 있던 상품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은 여사님들이 삼삼오오 옥상에 모여 계시기에 가 보니, 상추가 푸릇푸릇 올라와 있었다. 이제 위에서 봤을 때는 거의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라난 모습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여기서도 이렇게 잘 자랐네, 화분을 어딘지 모르게 기특한 눈으로 바라보던 여사님이 말했다. 상추가 제법 형상을 갖추자 매장에서도 발걸음을 멈추고 구경하는 고객들도 늘었다.


그 상추는 어떻게 됐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여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상추 화분 하나를 키우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마음을 모았다는 것이다. 저마다 맡은 일이 있고, 진열할 상품들이 있고, 고객을 응대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상추 화분을 옮기는 것은 모두 잊지 않았다. 상추가 잘 자라 제 시간에 듬뿍 햇빛을 받을 수 있도록. 그리고 그렇게 자라난 상추는 “살아 있는 매장”을 만들어 주었다. 덕분에 더 많은 상품들이 제 주인을 찾아갈 수 있었다.


비록 발아보증기간은 지났지만 햇빛을 받는 로즈마리 화분을 보며 잘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싹이 올라오지 않으면 여러 차례 다른 시도를 해 보다가 친구를 데려올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싹이 올라오면 나의 매장을 살아 있게 해 준 상추를 떠올릴 것이다. 그 상추를 쑥쑥 자라나게 한 모두의 노력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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