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넘칠 땐 종이에 덜어내어 눈으로 직접 보면 답이 보이기도 한다.
희망퇴직 신청 공고라는 큰 폭풍이 지나간 금요일의 사무실은 의외로 고요했다.
공지가 나기 전, 무성했던 희망퇴직 소문에 "빨리 희망퇴직 했으면 좋겠어요, 위로금 받고 나가게."라고 호언장담했던 젊은 직원들의 패기 넘치던 목소리도 잠잠했다. 다소 충격적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던 대기업 이커머스가, 나름대로 탄탄하다고 생각했던 내 자리가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모두의 눈에 이제야 변화하는 시장의 흐름이, 그리고 그 안에서 아무런 준비 없이 버텨야 하는 현실의 단편이 조금이나마 드러나게 된 사건이었다.
희망퇴직 신청마감까지 2주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리고 나는 이제껏 일해온 시간보다 몇 배고 더 많이 남은 날들의 방향을 잡을 결정을 해야 했다. 위로금을 생각하면 사실, 그냥 다니는 것이 정답이었다. 위로받기에는 너무 적은 금액이었고 숨만 쉬어도 나가는 고정비는 상당했으니까. 그러나 마음이 계속 일렁였다. 이게 맞는 걸까, 내가 나를 좀 더 가꾸고 들여다보면서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남편은 다행히도 이것도 기회니 잘 생각해 보고 무엇이든 응원한다고 해주었다. 고마웠지만 감정에 취해 선택할 수는 없었기에 비장한 마음으로 노트를 들고 카페로 향했다.
생각이 넘칠 땐 종이에 덜어내며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
속에 꽉 찬 생각은 넘실대면서 만든 파도로 감정만 어지럽히니까.
노트를 펴고 나의 현재 상태 6개를 넘버링하며 적어 내려갔다.
1. 피로도, 스트레스 매우 높음.
얼마 전 회사에서 했던 직장인 마음건강 검사 결과, 스트레스 반응 관리군 진단이 나왔다. 다행히 심리적 자원과 주변 가까운 사람들의 지지가 탄탄해 버티고 있다고 나왔지만 스트레스 지수는 상당히 심각했다. 전년에 받은 건강검진의 자율신경 균형검사에서는 피로도와 심장안정도가 '매우 나쁨' 지표의 만점을 기록했다. 여태껏 쉼 없이 달려오면서 조금씩 과부하가 오고 있었다. 친구는 얘기했다, 쿨러 한번 돌리고 가는 게 오래 쓰는 방법일 수도 있지.
오래가기 위해 잠시 멈춰 가는 게 옳을 수도 있다.
2. 돈을 벌어야 한다.
집에서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 최소한의 비용들을 생각했을 때 돈은 벌어야 한다. 게다가 대출이자는 어쩌고! 남편은 프리랜서여서 고정적인 수입을 기대할 수 없으니, 안정적인 생활과 남편의 정서적 안정감을 위해서는 내가 경제활동을 지속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3. 이직하기에 시장상황이 좋지 않다.
대기업 종합몰 유통 L사, 오픈마켓 시장 점유 상위인 E사가 이미 앞서 희망퇴직을 진행했다. 그 말인즉슨 시장 내 인재 공급과 수요의 밸런스가 무너져있다는 것. 능력 있는 이커머스 재원들이 구직시장에 많이 나와있고, 괜찮은 회사들은 경력채용은커녕 내부 구조조정으로 비용축소를 꾀하는 상태. 말 그대로 바늘구멍이었다.
4. 나는 이제 꽤나 많은 나이다.
30대 후반, 과차장급 직급, 부담스럽게 무거운 연차의 인재가 되어있었다. 새로운 도전을 하기엔 다소 무거운 나이.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여기에 더 있으면 있을수록 내 나이는 더 많아질 것이고 그때는 더욱 무거운 나이가 되었을 거란 것. 어떻게 보면 그래도 새로운 결정을 할 수 있는 가장 어린 나이었다.
5. 건강이 안 좋다
그해 들어 출근하다가 몇 번 지하철에서 공황이 온 적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퇴근 때는 같은 조건에서도 그러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출근하다가 눈앞이 하얘지고 코끝이 맹한 것이 속이 울렁대고 식은땀에 등이 흥건히 젖어드는 때가 있었다. 귀에서는 이명이 들렸다. 몸으로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휴직을 할 만큼은 또 아니었다. 참 그렇지, 아픈데 또 그만큼 아픈 건 아니어서 쉬지도 못하고.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공황이 온 순간에도 제 시간에 출근하겠다고 오전 8시의 지옥같은 9호선에서 주저 앉지도 못하고 손잡이를 부여잡고 서있는 나의 현실이 정신건강에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이다.
6. 그래도 내 옆에는 지지자가 있다.
다행히도 내 곁에는 오롯이 나를 지지해 주고 나의 행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있다. 내 행복은 곧 그의 행복으로 직결되기에 나는 행복할 선택을 할 의무가 있었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최초의 가족, 나의 남편. 다행히도 그가 있어서 심리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조금은 안정이 되었다.
상태들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항목들을 대입해 보고 점수를 매겼다.
거듭된 플러스, 마이너스. 사칙연산을 거듭하고 난 뒤, 답이 정해졌다.
"희망퇴직 신청하세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98%의 확신은 있었지만, 2%의 불안감이 있었다.
이 불안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