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 좀 다른 삶을 살아볼게요.
희망퇴직 이후 1년, 나는 퇴직금을 운용해 이윽고 경제적 자유를 얻었다.
-라고 말할 수 있었더라면 정말 이상적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좋을까!
당연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른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해 성공적인 반전을 기대하며 여기까지 읽게 된 분이 계시다면,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앞 서 말했듯이 나는 회사를 다닐 때도 돈보다는 성취와 명예, 평판 같은 형체 없이 무용한 것들에 집착하는 편이었다. 그랬던 내가 회사를 나왔다고 갑자기 수에 밝아져 목돈을 굴린다거나, 투자를 해서 경제적 자유를 이룰 수 있을 리가!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본디 돈이 많이 들지 않는 취향을 가진 덕에 씀씀이가 크지 않다는 장점과, 안정적인 수입은 없었지만 정해진 기간만큼 지급되는 실업급여로 경제적 결핍은 피할 수 있었다. 실업급여 수급을 위해서는 차수별로 정해진 횟수만큼 구직활동을 증명해야 하는데, 나름 성실하게 관련 있는 업계와 직무를 중심으로 구인공고를 검색하고 온라인으로 지원했다. 지원할 때마다 '아... 이러다가 덜컥 취업되면 어떡하지?' 걱정이 됐다. 참으로 쓸데없고, 오만한 생각이었다.
결론적으로 실업급여 증빙한 구직활동 내역 중, 면접까지 이뤄진 곳은 퇴직 2개월 차에 지인 추천으로 지원했던 IT기업이 유일했다. 나머지는 합격여부를 고지받은 곳은 2곳정도, 나머지는 채용진행 자체를 멈춘 케이스가 99%였다. 시장상황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소신 있게 회사를 박차고 나왔으면 뭔가 사람들이 기대하는 드라마틱한 멋진 전개가 있으면 좋으련만, 현실 퇴직자의 삶은 회사생활을 할 때보다 치열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꽁으로 얻어지는 것이 없다. 이게 바로 인생의 진리지.
그런데 재밌는 것은, 희망퇴직을 하지 않고 회사에 남았더라면 절망으로 여겨졌을 것 같은 이 현실이 막상 지금은 그저 '그렇구나, 어쩔 수 없지 뭐'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시장이 아무리 어렵다고 한들 내 커리어가, 내 능력이 꼭 필요했다면 안 뽑혔을 리 없다. 채용시장이야 말로 Give&Take가 확실하다. 꼭 필요한 니즈가 있고, 그걸 충족시켜 줄 요건이 확실하다면 아무리 바늘구멍이라 한들, 구멍은 구멍이다. 통과하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 그냥 내 조건이 시장에서 특출 나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하니 뭐 그럴 수 있지, 싶었다. 내 자리가 아닌 것이니 별 수 있나.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나는 뭐든지 열심히 한다. 어떤 일이든 어떻게든 되게 만든다. 이것은 이력서의 성격의 장단점란에는 차마 쓸 수 없는, 회사에게는 장점, 나에게는 단점이다. 나는 그게 내 직장생활의 가장 큰 패착이었음을 희망퇴직을 준비하면서야 깨달았다. 내 것이 아님에도 내 것을 다 털어 넣어 애정한다. 조직경영에서 직원의 오너쉽은 매우 중요하겠으나, 사실 오너가 아닌데 오너쉽이라니. 동기부여 없는 오너쉽만큼 허망한 것이 없다고 본다. 과도한 책임감과 오너쉽은 프로의식을 넘어 비뚤어진 동기화를 낳는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원래 내 것이 아니었음에도 빼앗긴 것 같은 느낌에 배신감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내가 다시 회사라는 조직에 들어간다면 나는 또 그렇게 살게 될 것이 분명하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그러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나는 정해진 규칙을 지켜 열심히 구직활동을 했고, 타의에 의해 다시 회사라는 조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니 내 탓이 아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하고 싶은 거나 실컷 해보자 싶었다.
문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의 대부분은 돈이 되지 않는다는 건데, 뭐 어때. 쌓이고 쌓이면 경험이 되고, 그 경험이 언젠가 돈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나? 꼭 모든 일이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서 경험을 쌓고, 기회가 되면 그것을 공유해 보자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런데 어떻게?
그러던 와중 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온라인 마케팅 관련해서 강사를 추천해 달라고 하는데 생각나서 연락했어요, 혹시 관심 있으신가요?"
어머나, 희망퇴직 전 확신을 얻기 위해 봤던 사주풀이에서 앞으로는 하는 것보다 더 잘 될 거라고, 주변에서 알아서 끌어준다더니.
그렇게 생각도 못했던 기회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