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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비움으로 채운 새 명함

퇴직하면 제일 먼저 명함부터 만드세요.

by 오늘

예상보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던 강의를 끝내고 짐을 정리하는데 수강생 중 한 분이 다가와 말씀하셨다.


"강사님, 명함 한 장 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 맞다. 명함.

뭔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그때서야 그게 뭔지 깨달았다.


그때 그때 가방 정리를 하지 않은 게으름 덕에 가방에는 전 직장의 명함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다 못쓰고 나온 명함이 집에 수북히 쌓여있었다. 근데 이제 나는 더 이상 그 명함에 써져있는 멋진 로고의 회사의 소속이 아니기에 쌓여있는 명함들 중 내밀 수 있는 명함은 없었다.

여태껏 나에게 명함은 소속감 그 자체였기 때문에, 회사를 나오고 나서 따로 명함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명함은 그럴 듯한 소속의 증명이였고, 나의 커리어의 반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속이 없어진 나에게 필요하다는 생각 자체를 못한 탓이었다.

그러나, 없어지면 동시에 나의 커리어도 다 물거품이 될 것 같았던 90mm*50mm 크기의 종이는 오히려 무소속인 지금의 나에게 더 필요한 것이었다. 명함은 더이상 소속의 상징이 아니라 나 자체를 소개하는 필수재였다. 원래 명함의 목적이란 게 그런 건데, 나는 고작 그 작은 종이쪼가리에 얼마나 큰 의미부여를 하고 있었던가.


"죄송해요, 오늘 명함지갑을 두고 왔네요. 명함 주시면 제가 연락드릴게요."


아무도 안 믿을 구차한 변명을 하고 집으로 오는 내내 마음이 급했다. 집에 가자마자 명함을 만들어야지!

그런데 명함을 만들어 본 적이 없다보니 어디서 어떻게 만들면 되는지부터가 막막했다. 이제까지는 인트라넷에서 양식을 다운받아 국영문 이름와 전화번호, 메일주소를 적어 지원부서에 전달하고 때되면 알아서 배달이 오던 명함이었는데 이거 또 어떻게 만들어야 되는거람. 회사 생활 십수년에 나이가 마흔이 다 되도록 처음해보는 것이 아직도 많다.


자영업자인 남편의 도움으로 명함제작 사이트를 추천받았다. 이름, 연락처 적으면 끝일 줄 알았는데 기본 템플릿이 눈에 차지 않는 탓에 종이재질부터 폰트까지 내가 선택해 빈 종이 위에 배치를 했다. 문제는 아직 갈 길을 정확히 정한 것이 아니기에 사업자를 낸 것도 아니었고, 특정 회사에 적을 둔 것도 아니기에 소속과 직책란에 따로 적을 것이 없다는 것.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단을 내렸다.


그냥 공란으로 두기로 한다.

지금의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때로 여백은 빽빽한 적재보다 더 많은 것을 얘기하곤 한다. 여백과 같은 현재를 그대로 인정하기로 하고 명함 한 면에는 내 이름 두 글자(심지어 평균 이름 글자수보다도 적다)과 휴대폰 번호, 이메일 주소만 적어넣었다.


반대편은 보통 회사 로고나 슬로건 같은 BI가 들어가는 영역이지만, 그냥 내 이름의 뜻을 넣기로 한다.

사실 명함을 주고 받는 동시에 이미 서로의 소속이나 만나게 된 경위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 서로 처음 자기소개하는 마당에 진짜 궁금한 걸 설명해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이름은 '오늘'. 듣는 동시에 99%의 확률로 이름에 대한 질문이 나오기 마련이다. 첫만남의 어색함을 해소하기에 내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스토리텔링하는 것도 꽤나 인상깊은 첫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나름의 전략이었다.

완성된 명함은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간 나에게 명함이 소속의 증명이나 있어보이는 타이틀에 묶인 그럴싸한 내 자신의 자의식같은 거였다면, 이제부터의 명함은 진짜 나의 증명이자 차떼고 포뗀 날 것의 자기소개가 되었다. 기존의 명함들은 서로 엮이고 쌓여 나의 히스토리를 만들었다면 지금 이 여백이 가득한 명함은 뭐든 될 수 있는 새 시작의 나를 소개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까진 몰랐다.

처음으로 직접 만든 명함으로 하게 되는 일이 또 난생 처음으로 하는 일이 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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