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파 이야기

당신을 위한 기도

by 토닥토닥 oz

영자 씨,

오늘은 파파 이야기를 하려 해.

우리 집 다사다난(多事多難)의 중심인 사람, 내 인생관을 만든 사람.

파파 이야기를 하면 흥분이 되어서... 뒤죽박죽 감정이 격해져서...

말이 아니고 글이니까 차분하게 써내려 갈 수 있을까?






아빠, 아버지라는 말이 정웅 씨에게는 어울리지 않아요.

그래서 파파라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따뜻해 보이지만 남의 것, 남의 말 파파.

이상하게도, 정웅 씨에게는 아주 잘 맞는 단어 같아요.


파파는 내가 당신을 이리도 미워하리라고는, 꿈에도 모르고 계시겠죠.

한 번은 속에 쌓인 말을 터뜨린 적이 있었어요.

그때 파파는, 드라마 속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외침처럼 그러시더군요.


"네가 나를, 나를... "


그때도 거하게 취하신 상태였기 때문에 기억은 못하실 듯합니다.


파파는 반응하면 일이 커지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영자 씨는 가만히 참는 걸 최선으로 여겼죠.

저는 파파를 달래고 잠재우려 애썼어요.

시끄러운 게 싫었으니까요.

어린 맘에 파파만 잠잠해지면 다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파파는 본인에 대한 사랑이라 생각하신 듯합니다.


어렸을 때는 그저 생각했어요.

'술만 안 드시면 좋겠다'

파파가 아니라 술이 언제나 말썽이라고 믿었으니까요.

가슴 조리고 있다가 외출한 파파가 아무 일 없이 돌아오시면,

기분이 좋으면, 그걸로 '다행이다'.

마음이 사르르 풀리면서, '오늘 하루 무사히'라는 안도감에 파묻혔습니다.


사춘기가 되면서는 '당신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계속 그렇게 생각했어요.


'당신만 없으면 정말 좋겠어.'

.

.

.


그런데 말이죠,

정말로 놀라운 건, 우리가 당신을 많이 아끼고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파파입니다.

우리의 감정절제가 탁월했기 때문일까요?

파파, 당신이 우리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난 단 한 번도 당신이 가족을 진심으로 아낀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어요.

그게 정말 너무 화가 나고, 또 화가 나요.

명절도, 크리스마스도, 생일도,

당신과 함께 했던 행복한 기억이 하나도 없다는 거.

내 평생 파파한테서 받아 본 선물 하나가 없다는 거.

'내가 기억 못 하는 게 아닐까?" 하루 종일 차분히 기억해 내려고 애써본 적도 있었어요.

그 아픔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하리만큼 선명해졌습니다.

그걸 감추려고, 나는 사랑받는 부잣집 귀한 딸처럼 행동한 적도 있었어요.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어요.

'파파가 술을 많이 드신 날은 땡잡은 날이다.

좀 전에 준걸 잊으시고 용돈을 자꾸 주시거든.'

뭐, 그런 정도?

일생에 한 번도 없었지만, '파파라면 그래야지' 싶은 그런 일들을 적당히 자랑하듯 늘어놓았어요.

과하지 않게. 훗...


영자 씨 역시 평생 그 슬픈 감정을 안고 살아가야 했을 테죠.

선택받지 못한, 사랑받지 못한 자의 아픔.


"생일, 결혼기념일, 어떤 날에도 그 흔한 시장 국수 한 그릇 사준 적이 없네"


한탄처럼 하시던 그 말씀이 잊히질 않습니다.

당신은 생일 때마다 영자 씨가 차려준 멋진 생일상 앞에서 만찬을 즐기셨으면서.


엄마가 몸져눕게 되었을 때도 당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요.

영자 씨의 아픈 시간이 길어지면서 '애들 고생시킨다'며

뼈 아픈 소리마저 서슴지 않으셨지요.


우리는 누구도 이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어요.

그 감정을 꺼내는 순간, 그 무엇은 형체를 갖추고 타올라,

우리를 통째로 삼켜버릴 것 같았으니까요.






제가 파파 이야기를 친구에게 한 두 번 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 상황을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에이, 그 시절 아버지가 다 그랬지요."


대부분 남자들이었어요.

어른이 되면 딸은 엄마 편, 아들은 아빠 편이라던가요.

동성의 삶을 더 이해하게 된다고들 하더군요.


어쩌다 한 번쯤 꺼낸 이야기라 많은 분들의 생각이 같은지는 모르겠어요.

부드럽게 잘 다듬어 표현된 제 감정이, 가볍게 받아들여진 걸 수도 있겠죠.

처절하게 아픈 것도, 동정받는 것도 싫었으니까요.

더 비참한 기분이 될 거 같았거든요.


누군가는 "그럼 그런 얘긴 하질 말아야지." 하실 거예요.

맞아요. 그래서 그 얘긴 잘 안 했어요.

그렇지만 어쩌다 한 번쯤, 목에 걸린 가래처럼 ", 퇴!"하고 뱉어 버리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꾹꾹 막혀있다가, 나도 모르게 울컥해버릴 때.

역시, 이건 내 문제라는 걸,

정답을 뻔히 알면서도 말입니다.


"너님 엄마는 그만하면 행복하게 산기다. 세상에 더한 놈도 쌨다*."


"노름에 여자, 술주정은 3종세트 아닌가? 술주정 정도야 애교지."


농담까지 섞어가며, 웃으며 하는 말이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을 읽다 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싶을 때도 있었지만,

좋은 부모를 추억하는 사람들,

고생스러운 날들을 이겨내는 가족의 힘을 볼 때면,

마음속 깊은 울림은 어쩔 수가 없었어요.


'왜 나는...'

그 말이 늘 가슴에 박혔죠.


그렇게 오랜 시간,

원치 않는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애써온 사람에게


"술주정 정도야..."


그 말은 뼈에 사무쳤어요.


365일 중 355일은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면 화가 나고.

화가 나면 싸우고, 성질대로 안되면 다 내팽개치고.

하루 종일 자고 나서 온정신으로 돌아오면 미안해하고.

다음엔 또 같은 일이 반복되고.


나쁜 일이 생겨도, 좋은 일이 있어도,

아무 일도 없어도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면 사소한 일에도 기분이 상하고.


이런 상황에서, '술만 안 먹으면 괜찮잖아'라는 말.

정말 괜찮은 걸까요?






파파는 지금은, 술을 드시지 않습니다.

간과 신장이 제 기능을 점점 잃어가고 있거든요.

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평생을 술과 희로애락을 함께 한 분이시니까요.

로(怒)와 애(哀)가 대부분이셨지만...


영자 씨가 떠난 뒤에도 크게 변한 건 없습니다.

말로는 괜찮다고 하시지만, 사실 괜찮은 건 하나도 없고,

듣기 싫거나 귀찮은 건 두 번 말하면 폭발하시고.

가족들은 당신 생필품쯤으로 여기시는,

당신은 항상 옳고, 당신만 아는, 남이었으면 싶은 사람.


영자 씨처럼 "고맙다", "좋다" 표현이라도 해주신다면 좋으련만.


곧 죽어도 당신이 다 할 것처럼, 당신은 남 다른 사람인 듯...

정말 어떤 순간엔 너무나 미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

그러다 힘없이 축 늘어져서 잠들어 계시면,

잠시 가졌던 제 모진 마음이 죄스럽습니다.

언제나 이런 갈등 속에서 헤매는 나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원망도 해봅니다.


그런 삶이 당신은 행복했을까요?


"그렇다"


한마디를 하신다면, 차라리 저는 위로가 될 거 같아요.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하다가, 타들어 가는 듯한 불안감과 두근거림.

이런 것들이 아직도 사라지질 않습니다.

물론 제 탓일 수도 있어요.

지나치게 예민한 내 심장 탓일 수도.

그래서 강해지려고 노력해요.

그렇듯, 세상에는 자기 몫이 있는 법이니까요.


너무나 피하고 싶지만, 가족의 인연으로 엮인 이번 생은, 당신이 나의 파파니까, 떠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아요.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게 그렇게 싫으면서도 말입니다.





P.S

파파 님,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다음 생이 있다고 해도 다시는.

그냥 스치지도 말아요.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어."


원망할 가족은 절대로 만들지 말아요.


더 멋진 인(人)으로 태어나, 더 멋진 가족을 만나고, 파파가 그토록 원했던 것들 다 이루시길.

그렇게 행복하게 사시길,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기도할게요.



*쌨다 : '많다'의 경상도 사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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