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클 향수와 오랜 친구 이야기
영자 씨, 깜짝 놀랄 일이 있었어.
양자 이모를 만난 거야. 우연히는 아니고...
서울 사는 둘째 아들 보러 오셨다가 우리 생각이 나셨다고 연락이 오셨어.
집으로 전화를 하셨더라. 전화번호가 예전 그대로라... 통화가 되었어.
부모님 지인분들 연락이 닿을 수 있어서, 우리가 집전화를 그대로 두었거든. 번호도 그대로.
지난주 일요일 10시쯤, "여보세요." 하고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니 주야지~, 큰애 맞지. 하이고 가시나,
니 엄마하고 목소리가 우째 그리 똑같노?
잘 지내나? 시간 있음 내 좀 만나도."
그렇게 얼떨결에 "네" 하고 바로 약속을 잡았어.
번거롭게 집으로 오시긴 싫다 하셔서, 집 근처 T커피전문점에서 뵙게 되었어.
나를 먼저 알아보시고 손을 번쩍 드시고는 아드님이 차로 태워줘서 편히 오셨다며, 묻지도 않은 말씀을 먼저 꺼내시고
"가시나, 니도 많이 늙었네. 세월은 어쩔 수 없나 보다"로 이어가셨어.
"네" 조그맣게 대답하고는
"잘 지내셨어요?" 하며 쭈뼛쭈뼛 이모 맞은편에 앉았지.
나는 얼굴이 그대로라고 하시네.
큰 변화가 없는 얼굴 이라나?
언제부터 갑자기 영자 씨 생각이 간절하더래.
왜 영자 씨 돌아가셨을 때 연락을 하지 않았냐고 화도 내셨고.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고 솔직히 말씀드렸더니,
"내 잘못이 크다." 하시면서 훌쩍하시잖아.
좀 당황스럽더라.
영자 씨 고향 친구, 양자이모.
다른 사람이 영자 씨를 찾으면 없다고 돌려보낼 정도로
영자 씨를 좋아했다던 이모.
정웅 씨랑 결혼할 때 "이 결혼 반댈세" 영자 씨를 붙잡고 말리다 파파 눈밖에 낫다던 이모.
교수님 사모되고 사는 결이 달라졌다며
영자 씨가 조금 부러워도 하셨던 이모.
영자 씨 친구 중에 유일하게 성형을 가장 많이 하셨던
그 이모.
그분이 날 먼저 찾지 않았다면 몰라 뵐 뻔했지 뭐야.
정말 이젠 할머니가 되셨더라.
그분은 호호 할머니는 아니 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여전히 멋지셨어.
요즘 유행하는 실버 그레이 단발머리에,
선명한 빨간 투피스, 커다란 흑진주 귀걸이, 검은 샤넬 백.
‘나의 센스는 죽지 않는다’ 컨셉의 세련된 시니어 모델 같았달까.
그 모습에 난 기가 살짝 눌리기까지 했지 뭐야. 하하.
"이모는 한결같네요. 여전히 멋지세요!"
"이제 다 됐지 뭐" 하시면서도 내심 좋아하셨어.
왜 아니겠어.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말.
죽을 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누군가가 계속 되뇌며 추억해 주었으면 싶은 말이잖아.
멋지다.
3시간 동안 거의 혼자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하셨어.
영자 씨가 정말로 그리웠는지 영자 씨 이야기를 하고 또 하시더라.
내가 알고 있는 영자 씨, 그리고 아직 몰랐던 영자 씨 얘기도.
나는 조용히 귀담아 들었어.
두 분이서 주말이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다는 거.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영화'는 거의 다 보셨다면서 여러 편을 얘기하셨지만, [맨발의 청춘]만 내 귀에 남았네. 두 분이서 함께 보셨다던 마지막 신성일-엄앵란 콤비 작.
정웅 씨가 언젠가 불렀던 이 노래.
맨발의 청춘 주제가였구나.
마흔네다섯 쯤이셨던 것 같은데…
파파 애창곡이 아니었는데 그날은 이 노랠 하셨어.
영화 속 신성일 님처럼 폼 잡고 멋들어지게 부르셨어.
인상적이었어. 오랫동안...
내 기억 속 멋진 파파 모습 하나, 이렇게 떠올라서 영상 담아본다.
근데 왜인지 난 영자 씨와 이 영화를 함께 본 듯한 기억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영화를 통째로 본 건 아니고,
‘추억의 한국 영화’ 같은 코너에서 명장면을 함께 본 것 같아.
지금도 그런 편집 영상들이 많잖아, 왜.
아마 그때 스치듯 남은 몇 장면이 내 기억 속에 박힌 거겠지.
그래서 [맨발의 청춘]은 내게 영자 씨와 정웅 씨, 두 사람을 함께 추억하게 만드는 영화가 되어버렸네.
"니 엄마 리즈시절에 엄앵란 닮았다는 소리 많이 들었데이." 하시며 또 한 번 훌쩍.
그 말엔 놀라지 않았어.
"말도 안 돼."라고 얘기할 뻔했지만, 바랜 흑백 사진 속에서, 당신의 옛 모습을 본 적이 있었으니까.
나도 옛날 사진 속 영자 씨가 엄앵란 님을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거든.
헤어, 옷 스타일, 그리고 표정...
그 시절 영자 씨 사진 보며, 어린 나이에도 굉장한 충격을... 하하;;
'이게 정녕 우리 영자 씨란 말인가'싶어서...
그 이후 "몇 벌 안 되는 옷 돌려 입으면서도, 내가 동네 멋쟁이 정도는 되었다."는 당신 말을 믿어주기로 했던 것 같아.
영자 씨가 정말로 좋아했던 배우는 [초원의 빛] 속 나탈리우드였는데, 양자 이모는 그건 잘 모르시더라.
그래서 영자 씨는 나탈리우드의 영화 속 반묶음머리를 나한테도 자주 해 주셨거든.
이상하게 위쪽 머리를 부풀려서 묶어 주셨는데,
그게 아주 난 싫었단 말이지.
다른 애들처럼 깔끔하고 단단하게 묶어달라고 투정 부리면 영자 씨는 '네 두상이 조금 삐뚤어서 반란스를 맞춰야 한다' 며 꼭지 빗으로 여기저기, 위쪽 옆쪽을 살짝살짝 빼서 "봉" 띄웠어.
그럼 난 학교 가는 길에 풀어서 하나로 묶어버렸고...
그 생각을 나 홀로 하는 동안에도 이모는 끊임없이 말을 이어가시다가,
문득 생각난 듯 "파파는 어떠시냐"고 물으셨어.
나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잘 지내세요, 그럭저럭." 했네.
무언가 더 말씀하시려다가 '멈칫'하시더니
"얼굴 봐서 반가웠다. 이젠 가봐야겠다." 하시면서 일어나셨어.
아드님이 모시러 오셨길래, 차가 있는 곳까지 따라가서 '안녕히, 조심히, 가시라' 손 흔들며 보내드렸어.
M. 나보다 3살 어린 이모 둘째 아드님.
이제는 "야" 소리가 나오지 않을 만큼 훌쩍 어른이 되었더라.
세월은 모두에게 공평했어.
적어도 그날 우리 세 사람에게는...
쓰는 방법은 다 자기 방식 대로였지만...
"다음에 또 보제이. 서울 오면 연락할게.
그땐 니 엄마 납골당을 같이 가보면 안 되겠나? " 하시길래, 그러마 했어.
'연락을 미리 못하고 와서 못볼수도 있겠다 했었는데,
이리 얼굴 보고 가서 다행이다' 하시면서
씩씩하게 뒷좌석에 타시고는 웃으며 사라지셨어.
안녕히 가시라 인사를 드린 뒤, 한참만에...
양자 이모. 사실 난 이모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초등학교 때, 방학이면 대구에 내려가서 그 집에 들르곤 했지만,
그때도 나는 이모보다 이모 신랑, 교수 아저씨가 더 좋았어.
다정하고 친절한 분이셔서 깍쟁이 같은 이모와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앞 정원 덩굴에 주렁주렁 달린 포도를 듬뿍 따 주시며,
누가 더 빨리 먹나 내기하자 했던 기억.
고기를 맛있게 구워주셔서 눈치 보면서도 많이 먹었던 기억.
와인을 무척 사랑하셔서 꺼내놓고 은근히 자랑하셨던 기억.
그러고 보니 난 그분에 대한 좋은 기억이 난 꽤 많다~
그런데 우리 집에 이모가 놀러 오신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아. 어릴 적엔 아예 없었던 것 같은데?
둘째 아들이 취업해서 서울에 살게 되면서 그 아들을 보러 오는 길에 겸사 몇 번 들리신 게 전부였던 듯해.
그때도 오실 때마다 이모 얼굴은 조금씩 달라져 있었고,
영자 씨를 '서울 촌뜨기'라고 놀려서 난 그 이모가 진짜 미웠었어.
"넌 서울 살면서 내보다 서울을 더 모르노." 하시면서.
'이모, 원래 서울사람은 한강유람선 안 타고, 서울타워도 안 가거든요?' 하고 쏘아대고 싶은 걸 꾹꾹 참느라고 아주 애먹었단 말이지~
그래도 꼭 다음에 영자 씨가 있는 납골당에 함께 가볼 수 있으면 좋겠다.
영자 씨, 기억하시나요? 제가 캐나다에서 돌아올 때 선물로 드린 분홍빛 향수를.
미라클, 향수이름이 촌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정말 기적이 일어나길, 이름에 끌려 나도 모르게 집어 들었던 그 향수.
고이 모셔만 두고 있길래 제가 뿌려 드렸더니,
"아이고 독하다." 하시면서
"너 써라." 하셨잖아요.
향수도 주인이 있다면서...
"나한텐 너무 강하고 올드하지, 치.
이향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란 말이야.
그래야 기적이 생기지. 이 향수 이름처럼. 미라클."
툴툴댔더니...
미라클 따라 하시며 "멋진 말이구나" 하셨지요.
어느 날 그 향수가 당신 화장대에서 보이질 않길래
"향수 어디 갔어요?" 하고 제가 물었어요.
양자 이모가 사정해서 선물로 줬다면서요.
그랬던 거 기억하시죠?
'향수가 주인을 찾았다.' 덧붙인 말씀도.
어이가 없어서 "영자 씨, 그거 비싼 건데 몇 번을 망설이다 샀다고요." 했더니
몰랐단 듯 "어쩌니. 미안해라." 하셨는데
모르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어요.
영자 씨가 알고 있는 몇 개 안 되는 외국 브랜드 중 하나였으니까요, 랑콤은.
.
.
.
그.런.데...
이번 일요일, 양자 이모는 제가 짐작도 못할 말씀을 하셨겠죠?
그걸 영자 씨가 이모한테 팔았다면서요?
우리 딸이 캐나다에서 사 온 비싼 향수, 랑콤이라면서.
"이름도 너무 멋지다 미라클, 기적.
내가 너한테 기적을 헐값에 넘기는 거야" 하시면서...
이모는 이미 그보다 더 고급진 향수도 많았지만
어쩐지 거절할 수가 없더래요.
'기적을 헐값에 넘긴다'는 그 말을 도저히 못 들은 척 할 수가 없더래요.
그래서 헐값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걸 사게 되었고, 기적이 필요한 순간엔 그 향수를 뿌렸다고 하셨어요.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아직도 영자 씨가 했던 그 말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하시면서...
"너무 멋진 말이제?
기적을 헐값에 산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겠노?"
들으면서도 너무 거짓말 같은 얘기라 생각했어요.
영자 씨는 정말 너무나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지난 7월 어느 날에 제가 그 향수를 샀어요.
백화점 들렀다가 눈에 띄길래.
그때보단 향기가 조금 옅어졌지만, 추억이 묻은 향은 자석 같아서, 끌림을 거부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문득 생각합니다.
'이제 나는 이 향수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을까?' 하고요
어쩌면 그때 제가 영자 씨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건 향수가 아니라 '기적' 그 자체였는지도 모르겠어요.
P.S
볼 때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한 채 둥둥 떠 있는 사람들 같았어요, 두 분은.
그런데 그날, 처음으로... 저는 그분이 영자 씨의 친구라는 사실이 실감 났어요.
기회가 된다면 꼭 양자 이모를 모시고 영자 씨를 뵈러 가겠습니다.
[드리는 말씀]
독자 여러분, 죄송합니다.
급히 수정하며 글을 올리는 과정에서 실수로 브런치 매거진으로 발행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고 브런치 북으로 다시 올리는 동안,
원래 예정했던 발행일을 지키지 못하고 다음날인 금요일에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다시없도록 세심히 살피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따뜻함과 소소한 기쁨이 함께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