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늦은 밤 전화가 왔었지.
"영자 씨? 무슨 일?"
밤늦은 전화에 내 온몸의 세포들이 반응을 하고 있었어.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며.
"잘 곳이 없다."
이건 또 무슨 소리?
차를 몰아 집에 도착했을 때, 방마다 공기는 눅눅하고 차가웠어.
늦팔월의 비 내리는 밤, 온기 없는 방 안에서 영자 씨는 바람막이를 걸치고,
거실 시멘트 바닥 위에 조용히 앉아 있었어.
우리 집은 그 당시 흔한 구조였던 반지하·1층·2층 다세대 주택이었고,
확장 겸 리모델링 공사로 여기저기 뜯어내고 다듬는 중이었지.
장판과 벽지가 뜯겨 나가, 군데군데 회색빛 속살을 드러낸 시멘트 바닥 위에
영자 씨는 마치 물먹은 천인형처럼, 자신의 무게에도 금세 쓰러질 듯 축 늘어진 채로 있었어.
"파파는 요?"
멍한 눈으로 대답 대신 고개만 절레절레.
이 시간에 집에 없다면, 전화를 걸어봐야 소용이 없다는 말.
사정해도 돌아올 리 만무하니까.
벌써 어디선가 세상만사 다 잊고, 이미 술통에 빠져 있겠지.
영자 씨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 상황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남편대신 나에게 전화를 했어.
시집간 동생네가 더 가까이 살고 있었지만, 제부에게는 감추고 싶었던 모양이야.
초라한 당신 모습을.
좋은 사람이었지만 영자 씨에게도 마지막 경계선이랄까, 지키고 싶은 자존심이 있었던 것이겠지.
'자정이 다된 시간에, 집으로 돌아오라고 사정할 일인가? '
나도 파파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어.
'영자 씨, 그때 난 큰 술독에 빠져, 내일도 모레도 파파가 평생 눈앞에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옛날옛날 전래동화에서 읽었음직한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언젠가부터 정웅 씨는 아픈 아내를 보살핀다면서 일도 놓고, 빈둥빈둥, 간간히 알바나 하고 계셨는데.
그것도 본인 기분 맞으면 하고, 아니면 말고.
익숙한 일이었고, 우리 가족 중 누구 하나 파파 앞에서는 토를 달지 않았어.
영자 씨만이 아주 가끔 참지 못하고, 영혼 없는 말투지만 진심을 담아 잔소리를 하기도...
하지만, 그 순간 파파의 반응이 어떠하든 결국 파파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터였고,
때로는 터져버린 마음의 소리가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잘잘못을 따지는 일 따윈 접어두는 편이 낫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어.
오랜 세월이 몸에 새긴 습관처럼.
이런 일을 벌여놓고, 고혈당에 저혈압이 있는 영자 씨를 홀로 버려두는 일은
'아픈 아내를 보살피는 정웅 씨'에겐 중요한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야.
"그러니까 무슨 집수리야. 리모델링이고 확장이고 신경 써줄 사람 어디 있다고..."
슬프기 짝이 없는 그 광경은 바닥 깊은 곳에 눌러 두었던 내 화를 끌어올렸고,
짧은 순간이었지만 미운 말을 쏟아내게 만들었어.
그렇게 우리 집으로 오는 동안 영자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만사 귀찮은 듯, 체념한 듯 방에 들어서자마자 풀썩 누워버렸어.
다음 날 '괜찮다며' 나서는 영자 씨와 따뜻한 아침을 챙겨 먹고는,
나는 그 썰렁한 집에 덩그러니 당신을 남겨두고 얼른 나와버렸어.
붙잡힐 새라 서둘러서...
'나도 내일이 있으니까, 영자 씨가 벌인 일이니까, 사람은 각자 자기 몫이 있으니까...'
되뇌고, 되뇌고, 또 되뇌면서...
집수리는 예정보다 길어졌지만 결국 마무리는 되었고,
빗줄기와 곤조* 부린 장 씨까지 뒤섞여 순간 엉망이 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 모든 일도 정리되고 웃픈** 과거사로만 남았네.
그렇게 지나가는 줄 알았어.
항상 그랬듯... 처리하는 자, 지켜보는 자, 관심 없는 자.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버텨내면서,
내일은 오늘이 되고, 오늘은 또 어제가 되어, 과거 속으로 묻혀 버리는 줄 알았어.
생각하면 숨 막히지만 왜인지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일상이 또 지나가나 보다 했어.
.
.
.
영자 씨,
핑계 같지만 여기저기 뜯겨나간 그 집에 파파 빈자리를 채우며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지 않았어요.
집이 예전보다 더 넓어지고 깨끗해진 뒤에도, 우리 모두가 함께 모인 그 집은 내게 이상한 답답함과 무게감을 주었거든. 영자 씨랑 정웅 씨랑 모여 사는 그 집에서 잘 버텨낼 용기가 저는 없었어요.
함께가 '짐'이 되는 그 감정을 털어버리고 싶었어요.
그건 정말 '그들만의 잘못이었을까'를 지금도 생각해 보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텅 빈 집에 나 홀로 남겨진 날, 나는 가끔 그날의 기억이 불쑥 떠올라요.
당신의 그 공허했던 눈빛과 함께.
그러다 문득 영화 [카사블랑카] 속 대사가 스쳐 지나가죠.
"Here’s looking at you, kid."
우리말로는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라 번역되었던, 주인공 릭(험프리 보가트)의 대사예요.
이상하죠.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도 없는데, 왜인지 그 대사가 자꾸 떠오릅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날 그 밤의 당신이 겹쳐져 생각나곤 해요. 참 엉뚱한 일이죠.
그날의 당신 눈빛이 이 영화 속 대사처럼 내 기억 속에 콕 박혀버린 까닭일까요?
주인공처럼 애정 어린 작별 인사를 아직도 건네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출처: 네이버에서 검색된 이미지, 문제시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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