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 Jun 01. 2021

쓰레기 전시


아빠 친구인 히피 아저씨가 전시를 열었다. 2년 만이던가, 3년 만이던가. 히피 아저씨의 전시가 열리는 날은 우리 가족이 미술관에서 모이는 유일한 날이기도 하다. 지난 전시에서는 커다란 작품에 레드닷도 붙였다. (그 ‘작품’은 고향집 내 방문 앞에서 하염없이 걸리적거리고 있다.)


아저씨는 내 결혼식에도 안 오고 남미로 훌쩍 떠나 그렇게 부럽게 하시더니, 거기서 쓰레기만 잔뜩 주워왔다고 했다. 쓰레기 전시에 초대한다는 메시지가 의아했는데, 진짜 ‘쓰레기’ 전시네!



작은 전시실에는 올망졸망한 쓰레기가 잔뜩 늘어져 있다.


크레이트에 매달려 있거나, 매트리스에 대롱거리거나, 나무 액자에 걸려 있는 것들은 남미 쓰레기고, 바닥에 있는 몸집이 큰 쓰레기는 청주 쓰레기다. 신고 간 신발을 살포시 쓰레기 옆에 벗어 놨는데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



쓰레기 같은 이름을 가진 ‘쓰레기’는 스페인어로 ‘바수라(basura)’다. ‘멕시코에서 바수라를 모았지’라고 이야기하니 뭔가 있어 보이던 걸. 어쨌든 수백 개의 바수라는 모여서 하나의 작품이 되고, 전시가 됐다.


멕시코 폐광산 쓰레기장에서 칼에 찔려 중환자실 신세를 지고, 도둑 혹은 걸인으로 오해받아 눈총을 받으면서 모은 쓰레기는 누군가의 눈에는 그냥 쓰레기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누군가의 눈에는 세상을 다르게 보는 눈이 될 수도 있고.


이건 누가 신던 장화일까, 이건 누구의 귀고리일까, 이건 누구를 위한 꽃이었을까. 물건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사람의 이야기를 그려볼 수 있다면 그것도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아빠가 제일 좋아한 메모

‘나 죽거든 술통 밑에 묻어주오.
운 좋으면 밑동이 샐지도 몰라.'
- 모리야 얀센



아저씨는 전시가 끝나면 쓰레기를 무게로 달아 시가대로 고물상에 팔고 아프리카로 간다고 했다. 부럽다. 가서 돌아다니다가 돌아다니며 얻은 것으로 내년 즈음에 또 전시를 하겠다고도 했다.


“그때 또 시간 되면 와서 내 성장도 한번 지켜봐줘.”


수줍고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말하는 아저씨가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성장이 멈추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는데, 자유롭고 커다랗게 성장 중인 아저씨를 보면 더 자유롭고 더 커다랗게 살고 싶다.



아무도 화환을 보내주지 않을까 봐 버려진 화환에 꽂혀있던 조화를 매달아 만들었다는 <자축>

조화가 에어컨 바람에 흔들리는 게 퍽 어울린다!



+

건너 건너 알게 된 지인이 어느 날 ‘예수쟁이와 예술쟁이가 제일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작가가 그렸다고 다 비싼 거냐고. 왜 그런 거냐고.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겠다고. 작가는 누가 정해주는 거냐고. 뭐든 예술이라고 이름 붙이면 예술인 거냐고. 만드는 사람도 문제지만 그걸 또 예술이라니까 사는 사람들도 문제라고….


나는 예수쟁이도 예술쟁이도 아닌 주제에 그 말이 굉장히 모욕적으로 들렸다. 제대로 말해서 설득하고 싶었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그런가’ 하고 말았다. 그래서 내내 그 말들이 나를 쫓아다녔다.

지금 다시 누군가 그렇게 말한다면, 이렇게 말해줄 거다.

“그럼 니가 해봐.”      


누구나 피카소처럼 그릴 수 있지만, 누구도 피카소가 될 수 없는 것은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늘 시작이 어렵다. 그래서 ‘최초’의 가치는 크다. 그림이 재현의 수단이었던 시대에 재현이 아니라 분해를 할 수 있었던 건, 피카소가 세상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상식을 깨트렸기 때문에, 한번 상식을 깨트리기까지 수많은 모방과 시도와 실패가 있었기 때문에 피카소는 피카소가 되는 것이다.

뒤샹이 놓은 변기는 ‘변기’ 자체여서가 아니라 미술관에는 ‘작품’이 놓여야 한다는 상식을 깼기 때문에, 에곤 쉴레는 야한 그림을 그려서가 아니라 나체는 아름답고 비밀스러워야 한다는 상식을 깼기 때문에, 위대한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물론 뒤샹의 <변기> 이후에 뒤샹‘처럼’ 아무거나 갖다 놓고 예술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을 무조건 옹호하고 싶지는 않다. 뒤샹은 일상의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고 했지, ‘그냥’ 가져다 놓은 ‘그것’ 자체가 예술이라고 하지 않았다.


모방인지 표절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예술가라고 떠벌리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메타적, 유가치, 근친성 같은 단어를 써가며 자기도 이해 못할 글을 ‘평론’이라고 이름 붙이는 사람도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을 다르게 보랬더니 비뚤게 보는 사람도 싫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자기만 옳다고 하는 사람도 싫다. 별 감흥은 없지만 나중에 돈이 될 것 같으니 작품을 산다는 사람도 싫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보다 ‘저건 나도 그리겠다!’ 같은 말을 무례하게 내뱉는 사람이 훨씬 더, 싫다.


내 삶과 생각에 영향을 끼치면 무명작가여도 내겐 예술가고, 1도 영향을 주지 못하면 대가여도 내겐 예술가가 아니다. 그러니 신경 좀 껐으면 좋겠다. 남이 예술쟁이든, 예수쟁이든, 뭐든.


나이가 들수록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참 좁고 얄팍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에도 이면이 있을 수 있다고, 그래서 갈수록 생각은 자유롭되 말은 조심해야 한다고 느낀다. 예술이든 뭐든 세상에 ‘쉽게’ 말할 수 있는 건 없다. 존중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모르겠고 이해가 안 되면 그냥 지나치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괜찮다'의 기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