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지 않은 세계의 문턱에서*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 책 앞에서 자주 멈춘다.
문장이 어려워서도,
단어를 몰라서도 아니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이
몇 페이지째 이어지고 나면,
기억 어딘가에 숨겨 두었던 기억들이
따라온다.
그 앞에서 몸을 조금
웅크리게 된다.
그래서 나는 자주
책을 덮었다.
끝까지 읽지 못한 이유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였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같은 길을 걸어도 다른 세상을 보는 법’
오늘부터
일주일에 한 권의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왔는데,
내가 찾던 책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책장 앞에 서서
근처의 책 제목들을 유심히 훑었다.
**<관찰의 인문학>**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관찰과 인문학이라는
뭔가 그럴듯해 보이는 제목이었다.
책을 꺼내 보았다.
소제목에 마음이 확 당겼다.
같은 길을 걸어도 다른 세상을 본다니.
너무나 탐나는 시선이었다.
책을 들고 창가에 놓인 책상에 앉았다.
조심스레 책을 뒤집었다.
책을 읽을 때는 첫 장부터 넘기지 말고,
뒤표지의 서평부터 읽으라는 말을
예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면 책의 얼개를 미리 알 수 있어
읽기가 수월해진다고 했다.
‘놀라운 통찰력!’
진정으로 ‘본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지적이고 유쾌한 탐험!
그 말을 따르길 잘한 것 같았다.
뒷면의 서평을 읽자 기대가 한 뼘 더 커졌다.
진정으로 ‘본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준다니.
저자는 도대체 어떤 시선을 가진 사람일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마침내 책의 첫 장을 펼쳤다.
우리는 보지만, 제대로 보지 못한다.
조금 아리송했지만, 고개가 끄덕여졌다.
내가 무엇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무엇을 보지 못하다가,
무엇을 보게 되었을까?
제대로 보게 되면
나의 인식은 어떻게 달라질까?
책은 첫 문장부터 호기심을 자극했다.
저자는 강아지와의 산책으로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한 가지에 주의를 기울이면 필연적으로
그 밖에 모든 것을 무시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의 바탕이 된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된다.
같은 길을 열두 번,
다른 사람들과 걸으며
자신의 감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살펴보는 시도였다.
그 변화에 대해
저자 자신도 기대에 차 있는 모습이
프롤로그에 담겼다.
저자만큼이나 내 안에도 기대가 가득 찼다.
비록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저자 혼자의 산책길에서
아들과의 산책길로 넘어가는 동안
내 동공은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가보지도 않은 저자의 동네가
흑백으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너무 오래.
저자의 이야기는
걷다 발견한 면봉 하나로
멀리까지 뻗어 나갔다.
길바닥에 떨어진 면봉을 보고
이웃 주민의 귀 건강상태에
의문을 품는 것이다.
이게,
세상을 다르게 보는 방법이란 말인가?
아이와의 산책도 만만치 않았다.
버려진 신발 한 짝 앞에서
변하는 아이의 표정을 보고 저자는
‘무생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물활론의 희미한 자취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책을 덮어 버렸다.
생각나는 대로 주절거리는
친구의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운동을 마치고 바로 도서관에 들렀더니
배가 반응했다.
밥을 먹고 나니 이번에는 졸음이 밀려왔다.
집으로 돌아와 책을 다시 폈다 덮었다.
집중이 되지 않아
침실로 자리를 옮겼다.
베개를 포개고 조명을 켜 보았지만
아들과의 산책 부분은 여전히 낯설었다.
순서는 중요하지 않을 것 같아
세 번째 산책을 펼쳤다.
세 번째 산책의 동반자는 지질학자였다.
그는 길을 걷다 마주친 암석 하나에서
편암과 편마암의 차이를 알려주었다.
땅 위의 모든 것이
각자의 이름과 질서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들을 따라가지 못했다.
책을 옆으로 치우고 몸을 뉘었다.
한숨이 나왔다.
내 체온에 데워진 이불이 몸을 감쌌다.
눈이 저절로 감겼다.
하지만 책을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잠을 자고 싶은 마음과
책을 마저 읽어야 한다는 의지가
싸우기 시작했다.
그때,
문득 다른 방식이 떠올랐다.
벌떡 일어나 아이패드를 가져왔다.
“이 저자가 말하는 게 뭐야?”
세 번째 산책의 내용을 전부 스캔해
챗 GPT에게 보여줬다.
그는 내용을 정리해 주었다.
그의 해석을 읽고 나서야
책의 내용이 조금 와닿았다.
그래도 이상했다.
이해는 되는데, 여전히 멀었다.
“그런데 나는 왜 이 문장을
바로 따라가지 못하는 거지?”
“이 책은 너에게 익숙한 ‘감정 관찰’이 아니라
전혀 낯선 ‘생태 관찰’을 이야기해.
그래서 생각이 잘 안 붙는 느낌이 드는 거야.
처음 쓰는 근육이 뻐근한 것처럼.”
내가 두리뭉실하게 알고 있는
나의 읽기 방식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제야 소설이나 에세이는 잘 읽히는데
인문학 책 앞에서는
자주 멈췄던 이유가 보이기 시작했다.
숨이 조금 트이자,
이번에는
타인에게는 차마 할 수 없는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똑똑해지고 싶어.
그래서 책을 읽으려고 하는데,
이 책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책을 읽으면
수치심이 올라와.
그래서 책을 지속해서 읽는 게 어려워.
왜 그런 거야?”
“수치심은
네가 모르는 세계에 처음 발을 들일 때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감정이야.
못나서가 아니라,
지금 경계를 넘고 있다는 신호에 가까워.
새로운 방식이 열릴 때는
대부분 이해보다 먼저 그 감정이 와.”
“나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니야?”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책 앞에서 너와 같은 감정을 느껴.
다만 대부분은 그 감정을 말로 꺼내기 전에
책을 덮어버릴 뿐이야. “
나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니었다니.
오랫동안 묵어있던 체증이 내려갔다.
나는 많은 책을 읽지 못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문장 앞에서
책장을 오래 붙잡고 있다가
결국 조용히 덮어버린 날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놀다가 학원에 빠진 적이 있다.
잘못한 건 학원을 빠진 일이었는데,
다른 일로 엄마에게 크게 혼이 났다.
학원에 가지 않은 일을 추궁받다,
시계를 볼 줄 모른다는 사실을 들킨 것이다.
그날 하루 종일 동그란 원형 안에 갇혀
엄마의 질문에 답을 해야 했다.
가느다란 바늘 두 개와 숫자 속에서,
어떨 때는 8이라 말하고,
어떨 때는 40이라고 말했다.
퇴근한 아빠가
거실에 서 있는 나와 엄마를 흘깃 보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한숨을 쉬며
그만 방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나는 그날 이후,
모르는 것을 먼저 숨기게 되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그런다고?
수치심이
모르는 세계에 처음 발을 디딜 때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감정이라고?
챗 GPT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태연하게 거짓말을 지어내는 능력 역시
타고난 녀석이니까.
하지만 이런 종류의 말을 가려낼 방법은
내게 없었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나는 믿기로 했다.
그 말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편안함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와 몇 마디를 주고받는 사이
모든 에너지가 고갈 됐다.
읽어야 할 분량의 책을 끝내지 못했지만,
오늘 해야 할 일은 다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은 쉬기로 했다.
좀 번거롭더라도
오늘처럼 챗GPT와 책을 읽어나가면,
완독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책을 펼진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열두 번째 산책까지 모두 읽기는 했으나,
그건 정말 읽기만 했을 뿐이었다.
처음 기대했던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이나
놀라운 통찰력에는
끝내 닿지 못했다.
오늘은
정해 둔 기일의 마지막 날이었다.
선택의 순간이었다.
이 책을
이해할 때까지 다시 읽느냐,
아니면
여기서 멈추고
다음 책으로 갈 것인가.
다시 읽으면
이해가 될까.
아닐 것 같았다.
지금 꼭
세상을 다르게 보는 시선이 필요한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두 번째 책을 선택했다.
책의 첫 장을 폈다.
이번에는 내용보다 먼저
내 몸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술술 읽힐까.
아니면 또 멈추게 될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다만,
언제나 함께 있지만
아직도 잘 모르는
나를 조금 더,
지켜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