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회전문을 돌며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가스통 르루의 소설을 뮤지컬로 각색해 올린 작품으로 지금은 웬만한 사람은 다 알만큼 세계적인 뮤지컬이 되었다.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티켓값으로 악명이 높지만 이 작품과 코드가 맞는 뮤덕이라면 어느새 정신줄을 놓고 회전문을 돌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오페라와 뮤지컬이 뒤섞인, 극고음을 넘나드는 아름다운 넘버들이다. 때문에 배우들에게도 <오페라의 유령>은 소화하기 어려운 작품이라고 들었다. 나 정도 잔잔바리가 덕후라 할 수는 없지만 예전에는 공연 보는 것을 꽤 즐겁게 여겼고, 내가 본 공연 중 단 하나의 작품을 꼽으라면 <오페라의 유령>인데, 갑자기 가까운(?) 곳에 무대가 열려버린 것이다.
3월에 부산의 드림씨어터에서 개막하여 (부산에 안 산다) 이제 막공을 앞두고 있는데 (끝나면 서울의 샤롯데씨어터로 간다고 한다) 이 작품을 보기 위해 고생이 고생인 줄 모르고 남편과 번갈아가며 소소하게 회전문을 돌고 있다. 뭔가 살짝 이성이 앞설 때마다 남편과 내가 서로의 이성 따위 뻥뻥 날려주면서 해맑게 무지성 관극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공연의 묘미는 회차마다 같지만 다른 공연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같은 배우의 공연을 반복해서 봐도 매 회차마다 연기의 디테일이 조금씩 달라진다. 더구나 배우 연기 스타일에 따라 같은 캐릭터도 조금씩 다른 느낌으로 보는 재미가 있다.
기본 디렉팅이 있는데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다고 한다면 또 그 말도 맞는 말이다. 그렇다. 그냥 보고 싶어서 보는 것이고, 회전 돌고 싶어서 회전 도는 것이다. 반드시 봐야 할 필연 따위는 없다. 사서 고생을 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이번 공연에서 남편과 나의 최애 픽은 유령 역을 맡은 김주택 배우이다. 그는 원래 유럽에서 활동하던 오페라 가수였다고 한다. '팬텀싱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유명세를 타 알게 된 바리톤인데 묵직하면서 압도적인 성량으로 정말이지 유령 역할에 찰떡인 목소리를 가진 배우다.
이번 <오페라의 유령>은 쟁쟁한 캐스팅으로 뮤지컬로는 신인이라고 할 수 있는 김주택 배우는 다른 유령들보다 인기가 조금 없기도 한데 그게 팬으로서 안타깝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고마운 것은 상대적으로 좋은 자리 티켓팅이 쉽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껄껄. (미안해요, 배우님.)
<오페라의 유령>은 스스로를 '음악의 천사'라 부르지만 흉측한 외모 때문에 얼굴을 가린 채 세상을 등지고 사는, 찌질하고 변태끼도 낭낭한 한 고독한 남자의 지독한 짝사랑 이야기이다. 한 때는 철창에 갇혀 사람들에게 돈을 대가로 구경당한 안타까운 과거를 가지고 있기도 해서 사기나 스토킹, 납치, 살인 등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인데도 관객들에게 짠내를 듬뿍 안겨주는 캐릭터이다.
그는 자신을 버린 세상과 모든 사람들에게 오로지 적의만을 가지고 있다. 외모만큼이나 일그러진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에게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의 영원한 뮤즈 크리스틴이다. 유령은 크리스틴을 짝사랑하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크리스틴은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그는 나를 배신하지 말라고 절규하고 구슬려도 보고 협박도 하지만 결국에는 스스로 크리스틴을 놓아주며 막이 끝난다.
유령의 광기 어린 애절함과 질투심으로 분열된, 지붕을 날려버릴 것 같은 위압적인 목소리의 넘버들을 듣고 나면 크리스틴처럼 속절없이 그를 숭배하게 되고 만다. 어떤 때는 유령을 거절하는 크리스틴이 야속하다는 생각까지 들 때도 있다. 뭔가 스톡홀름 증후군을 간접 경험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공연 내내 유령의 고독에 전염돼 끙끙 앓고 오는 것 같다. 공연이 끝나도 쓰디쓴 입맛은 한동안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게 그의 상사병은 나에게로 옮아와 울지도 못하고 쓴 커피만 들이켜게 한다.
이제 딱 한 번의 관극만을 앞두고 있다. 기대가 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내 인생에 다시 올지 모를 빅 이벤트 김주택 배우의 <오페라의 유령> 고마웠어요. 진짜 즐거웠어. (일단은... 일단은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