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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Jul 06. 2023

헤르만 헤세와 죽음

헤르만 헤시의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와 <데미안>은 작가의 소년 시절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자전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소설이었다. 일인칭으로 서술되어 있고 내면묘사가 탁월했다. 읽은 소설에 따라 때로는 한스로, 때로는 싱클레어로 빙의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방황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라서 인지 문체에서 특유의 병적인 느낌도 읽을 수 있었다.       


학업의 압박과 기 센 친구 등 청소년기의 억눌린 상황은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보다 현실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채 부모와 교사에게 휩쓸리는 한스의 삶에서는 은근하게 깔린 계급의 문제를 읽을 수 있다. '수레바퀴에 깔리는' 것은 한스의 아버지와 한스가 맞닥뜨리고 싶어 하지 않는 중산층에서 하층민으로의 추락인 것이다. 그러나 한스는 아버지의 기대를 실현하지 못하고 노동자가 된 채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다.     

 

한스의 죽음, 이 장면은 다소 모호하게 처리되어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 같다. 자살이냐 사고사냐? 나는 한스의 죽음이 사고사라고 상상했는데, 한스는 죽음을 결행할 만큼의 힘이 있는 캐릭터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고사가 말이 안 된다고도 할 수 없는 게 꽐라가 된 채로 실족사하는 일은 요즘에도 종종 벌어지니까 말이다. 사실 넓은 의미로 봤을 때 자살이냐 사고사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다만 내가 궁금한 것은 소설 안에서 한스가 왜 갑자기 죽게 된 것이냐는 것이었다.      


한스가 수레바퀴에 깔리지 않고 적응하기 시작했기에 그에게 죽음이 온 것일까? 한스의 계급에 대한 인식과 회피적 성향을 떠올려봤을 때 어쩌면 현실과 이상의 불일치로 혼란스러웠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노동자가 된 것도 현실에 휩쓸린 선택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는다고? 석연치 않았다. 헤세의 소설이 자기 고백적인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작가가 자신의 삶에서 답을 찾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한스가 노동자로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느끼길 바랐다. 단련된 근육으로 수레바퀴 따위는 뒤집어엎어버리면 그만이다. 기름때 묻은 손으로 드센 여자와 밀당도 하고, 결혼도 하고, 세 쌍둥이쯤 낳아 와글와글 정신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봤다면 좋았을 텐데. 때로는 극적인 새드엔딩보다 개연성이라고는 개나 줘버린 뻔뻔한 해피엔딩이 마음에 들 때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인간 헤르만 헤세의 삶과 자기 고백적인 그의 작품세계를 떠올려볼 때 그야말로 허무맹랑한 상상에 불과한 마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반전이라면 반전이라고 할 수도 있을 한스의 죽음은 대충 이렇게 정리되는 듯했다. 그리고 펼쳐 든 헤르만 헤세의 두 번째 소설에서 다시 죽음이 반복되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내면으로 여행을 떠나는 소설 <데미안>의 결말에서 갑작스럽게 만난 죽음이다. 정치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법한 전쟁 장면에서 나는 전쟁 그 자체보다는 죽음의 이미지가 더 짙게 떠올랐다.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을 전쟁(죽음)이라니.    



  

어쩌면 인간 헤르만 헤세에게 죽음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것을 끝내고 새로 시작하고 싶었던 끈질긴 욕구가 있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거가 뭐냐고 묻는다면, 없다. 그냥 느낌적인 느낌이다. 답은 소설이 아니라 헤르만 헤세의 삶에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헤르만 헤세의 삶과 작품의 관련성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서 <헤르만 헤세의 진실: 우울증, 경건주의, 그리고 정신분석/ 민성길 지음/ 인간사랑>이라는 책을 찾아 술렁술렁 읽기 시작했다. 헤르만 헤세의 불행하고 혼란스러웠던 생애는 예상대로 소설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잊을만하면 주기적으로 발병했던 우울증과 자살 충동.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는 양가감정적 모습, 이에 따른 죄책감, 어머니로부터 충분하게 사랑받지 못했던 갈증, 다시 재발하는 우울과 자살 충동.      


아버지의 이미지는 교사나 정신분석학자들, 사회적으로는 종교와 반전운동 등으로 확장되면서, 이들에 대한 양가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평화주의자였던 헤세가 <데미안>에서 전쟁을 옹호하는 것 같은 문장을 쓴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수레바퀴 아래서>의 도피적이며 한스를 벌주는 것 같은 갑작스러운 죽음과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는 구원과도 같은 <데미안>에서의 죽음. 헤세는 평생 자살충동에 시달리면서도, 막상 죽을 때 느껴질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컸다고 한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려는 시도로서 그는 되새김질하듯 등장인물들이 죽는 장면을 묘사해 왔던 것이다.      


헤세의 삶과 작품의 관련성을 살펴보고 나니 작품보다 더 파란만장하고 극적으로 살아온 것이 그의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티가 안 날 정도로 치밀한 구조속에 숨겨진 디테일을 찾는 재미로 소설을 읽는 나에게 헤세의 글이 왜 명성만큼 큰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우울증은 유전인자도 큰 것으로 알고 있다. 헤세의 경우에도 아버지, 어머니, 아내, 아들까지 모두 우울증으로 고통받았다고 한다. 헤세가 우울증을 그냥 심플하게 '또 왔네, 또 왔어. 나 아픈 거 유전이야' 선언하고 정신분석보다 알약 한 알로 해결해 버렸다면 우리는 <데미안>을 만날 수 없었겠지.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대작가 헤르만 헤세이니 다시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느 쪽을 선택할지 마냥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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