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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문학동네>

by 오늘

마침내 올 것이 왔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서술되어 읽어내기 꽤나 까다롭다고 소문난 책이다. 원래 계획은 그게 아니었는데 운이 좋아 열린책들 버전과 초신간인 문학동네 버전으로 재독까지 하게 되었다. 확실히 소설은 재독부터가 찐인 듯. <댈러웨이 부인> 역시도 희뿌옇게 안개 낀 것처럼 희미하고 모호했던 느낌들이 재독을 하는 과정에서 꽤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 또한 완벽하지는 않다. 나는 그저 문장들을 지나갈 뿐임을 알기에 더 욕심부리지는 않겠다.


첫인상은 생각보다 낯설지 않았다. 아니 에르노의 <세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 등의 소설들에서 기존의 익숙한 방식과는 다른 흐름의 서사의 맛을 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중 인물들에게서 나의 개인적인 특징들을 살짝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행이 지나간 것 같으면서도 인스타에 계속해서 관련 게시물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 (알고리즘의 얄궂음이란!) MBTI는 여전히 나와 같은 사람이 다수 관심을 갖고 있나 보다. 사실 인터넷에 떠도는 MBTI가 별자리 운세나 혈액형 성격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알고리즘을 타고 올라오는 MBTI 관련 게시물들은 어쩐 일인지 초집중하여 읽게 된다.


소설 <댈러웨이 부인>의 중심인물인 클라리사 댈러웨이와 그녀가 결혼 전에 썸 타던 남자 피터, 전쟁용사이지만 치유할 수 없는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 느낌적인 느낌으로 이들은 모두 직관적이고 감정을 선호하는 성격인 'NF'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포털 검색으로 조금 더 알아보자.


# NF의 특징^^
‣ 직관적 사고 : 구체적 사실보다 가능성과 맥락을 중시, 추상적 사고
‣ 감정적 공감 : 타인의 감정을 민감하게 읽고, 동정심과 온정적인 태도
‣ 가치관 중심 : 내면적 자아실현과 이상적 세상을 지향
‣ 창의성과 예술성 : 상상력이 풍부하고, 상징적으로 표현

싱크로율이 꽤 높지 않은가요? 그렇습니다. 저도 NF예요.


그래서 클라리사 댈러웨이의 하루를 쫓아가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작중 인물들에게 내적 친밀감을 많이 느꼈음을 수줍게 밝히고 싶다. 서론이 너무 구구절절이구나 싶지만 고치지 않고, 다시 소설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이야기는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 꽃을 사러 나가는 영국의 상류층 부인 클라리사 댈러웨이의 시선으로 시작한다. 때는 막 전쟁이 끝난 직후이다. 클라리사가 지나가는 거리는 전쟁이 끝난 뒤의 홀가분함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슬픔이 뒤섞이고, 왕정의 경직과 자본주의가 주는 자유로운 느낌 같은 것이 엉켜 경쾌하지만 혼란스럽다.


그녀의 파티 준비를 하는 틈틈이 여러 상념들을 떠올린다. 뭔가 큰 사건은 없다. 그녀는 과거를 회상하고,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나 지인들의 말과 행동 같은 것을 다시금 새겨본다. 파티가 시작되고 순간 클라리사의 내면은 흔들리지만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직접적인 연결지점은 없는, 다만 동시대인인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된 클라리사는 생각한다. ‘도대체 무슨 심산으로 이 파티에서 죽음을 이야기 하는 건가?’


클라리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파티다. 그녀는 섬세하게 파티를 준비한다. 아마 그것이 당시 상류층의 기혼 여성에게 부과되는 과제이기도 했겠지만 클라리사는 파티를 상당히 즐겼던 것 같다. 파티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일이자 자기 존재의 의미를 재확인하는 일이기도 했으니까.


남편과의 관계도 예전 같지 않고, 딸은 자신보다 다른 이와 더 가깝다. 파티에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지만 지인들과의 교류는 피상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와 뭔가가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닌데 클라리사는 삶의 많은 부분이 어딘지 모르게 삐걱대는 느낌을 받으며, 공허하다.


“정말이지 클래리사는 총리가 와주어서 감사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방안을 걸어가는 동안, 샐리도 거기 있고 피터도 있는데다 리처드는 흡족해하고 손님들 모두가 아마도 조금은 부러워하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 클래리사는 순간의 도취감을 느꼈다. (...) 클래리사는 그 감정을 사랑하고 그 느낌이 짜릿하기는 해도, 이런 겉모습, 이런 승리는 어쩐지 공허했다. 236쪽”


그래서였을까. 클라리사는 자신이 주최한 파티 분위기를 망칠까 봐 셉티머스의 죽음이 언급되는 것을 꺼리면서도 내면에서는 그의 죽음을 ‘제 몸으로’ 경험한다. 그리고 알아챈다.


“그녀의 인생에서 잡담에 파묻히고 훼손되고 흐릿해지는 것, 날마다 부패와 거짓과 잡담 속에 빠지는 것. 그것을 그는 지켰다. 죽음은 저항이다. 죽음은 도달하려는 시도다. 249쪽.”


클라리사는 셉티머스의 죽음을 통해 자기 삶의 본질을 냉정할 정도로 날카로운 시선으로 이해해버리고 만다. 무의미 위에 쌓은 폐허일 뿐, 그녀 삶의 공허는 필연적인 것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클라리사는 자기 삶 안에서 그렇게 죽음의 한 조각을 이해한다. 클라리사의 생각처럼 셉티머스에게 죽음은 저항이었다. 무엇에 대한 저항이었을까. 셉티머스에게 죽음은 죽음에서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클라리사가 자기 삶이 부패하고 있음을 깨달았듯이 셉티머스에게도 삶은 곧 죽음이었다. 셉티머스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다. 그러나 생명은 그의 육체에만 한정된 것이었다. 기억은 여전히 전쟁터의 죽음 속에 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고 환상을 본다. 아내도, 의사도, 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시간이 흘러갈 뿐이다.


빅벤의 울림은 등장인물을 환상이나 상상에서 현실로 돌아오도록 하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무심히 흘러가며 삶의 무의미함을 드러내는 사물이기도 하다. 클라리사와 셉티머스는 다른 삶을 살고 있으나 같은 시간을 통과해 가는 동시대인이다. 클라리사와 셉티머스가 그러하듯 우리의 삶은 완전히 개별적일 수 없다.


그러나 클라리사는 자기 삶의 공허와 살아있으면서 죽어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어쩌면 이제 그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다시 한번 파티의 장소로 돌아간다. 셉티머스가 죽음으로 살아가듯 클라리사도 계속되는 그 모든 것을 다시 한번 살아보기로 마음먹는다.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되어도 좋지만 죽음을 사는 것으로 삶이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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