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은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쓰는 일은 어떤 의미인가요?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어크로스]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만 진지(?)하게 독서하기 시작한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주로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쓴 소설을 읽어왔는데, 문장들은 내 안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금세 어디론가 흘러가버리곤 했다. 당시에는 그게 꽤 불만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쓰인, 한 장르의 책만 읽다 보니 다가오는 언어들도 고만고만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러한 느낌은 다름 아닌 독자로서 나의 한계이기도 했던 것 같다. 잘 읽히고 재미는 있었지만 읽으나 마나 삶이 크게 달라지지도 않는데, 책을 왜 읽는가, 하는 생각도 있었다.
대략 4년 전쯤? 코로나 팬더믹이 한바탕 몰아친 후 어느 정도 일상이 회복되어 가던 봄날, 우연한 계기로 세계문학, 중에서도 고전을 읽게 되었다. 책을 좋아한다면서도 고전은 아예 읽지 않았어서 처음에는 완독 하는 과정 자체가 어려웠다.
작가마다 달라지는 개성 있는 문체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고, 기존의 관념을 깨고 뒤흔드는 파격적인 등장인물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도 난감했다. 그러나 고전이 대부분 ‘신계’에 있는 작가들의 작품이다 보니 어렵고 때로는 지루하게 느껴지는 문체 안에서도 차츰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었다.
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등장인물을 소설의 맥락 안에서 빙의해 버리는 경험까지도 하게 되었다. 작년 연말에 읽었던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그 정점에 있었던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그 작품까지 읽고 나니 어느 정도 고전의 맛을 봤구나 싶은 느낌, 이제 웬만한 책은 두려움 없이 다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 권의 책을 내면 깊은 곳까지 끌어내려와 전 존재와 언어를 사용하여 재해석해내는 일,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그렇게 읽고 있다. 책을 읽는 것이 왜 이렇게까지 절실한 일이 되어버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나를 잘 몰랐고 타인과 세계 또한 그러했다. 그래서 자주 길을 잃었고 우울했다. 고전을 읽으며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물음표들을 풀어나갈 수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독서는 내가 절대로 모른 척할 수 없는 어떤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질문을 따라 책을 읽다 보면 내면에는 형상을 갖추지 못한 언어들이 마구잡이로 쌓였다. 고여있는 그것들을 뱉어내기 위해 짧게라도 단상을 적기 시작했다. 각 잡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운이 좋아 같은 책을 읽고 쓴 글을 나눌 수 있는 ‘동료’들도 만나게 되었다. ‘강제 독서’와 ‘강제 글쓰기’로 엮인 작은 공동체 안에서 어쨌든 읽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쨌든 끄적일 수 있었다.
글을 쓰면서부터는 오히려 읽은 책에 대한 집착이 줄어드는 것 같다. 독서는 그저 내가 통과해 가는 시간과 같을 뿐, 근본적으로 쌓이는 것이거나 삶을 달라지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에 대해 도통할 정도로 이해도가 높아져도 내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부대낌이 줄어 숨쉬기가 편해진 정도랄까. 언제까지 이렇게 책을 읽고 짧게라도 글을 쓰는 일상을 향유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은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읽은 책과 잘 헤어지는 방법의 하나로, 내가 삶과 잘 헤어질 수 있는 과정의 하나로 나는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