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현대인의 신탁 그들의 운명

그리스 비극 걸작선|천병희 옮김|도서출판 숲

by 오늘

현대인의 신탁 그들의 운명


<그리스 비극 걸작선>은 인간의 이야기였다. 여섯 편의 이야기 중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어 형벌을 받는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만 예외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신화가 피할 수 없는 자연적 힘에 대한 찬미와 권력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면, 비극은 필멸하는 존재인 인간의 운명과 아이러니를 다룬다. 비극은 국가가 거행하는 제례의 한 부분으로 ‘경연대회’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발전을 거듭한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등장인물의 수가 늘어나며 이야기의 갈등구조도 복잡해진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 욕망과 삶의 본질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하듯 그리스 비극 또한 이야기의 원형으로 현대의 수많은 창작자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비극의 주제는 운명과 충돌하는 인간 삶의 아이러니에 대한 것이다. 비극 속에서 인간은 운명 안에 갇힌 존재로 순응하거나 자기 의지로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실패하여 결국 파멸에 이른다. 여섯 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는 잔인한 신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오이디푸스는 자기도 모른 채 운명을 실행하며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다른 작품 속 인물들도 비슷한 상황. 재미있는 점은 일부 여성 인물들은 자신의 의지를 이루어내는 모습으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세계관 속에서 운명은 신조차도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프로메테우스는 미래를 볼 수 있는 존재였으며, 인간이 신의 시대를 끝낼 것을 알고서 불을 전해준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리스 비극 걸작선>의 역자 천병희에 따르면 이미 기원전 5세기에도 ‘신화의 전통적 가치관이 현실 세계와 갈등하며 모순’(17쪽)을 드러냈다고 한다. 신화의 영향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인간에 대한 탐구에 집중하는 것이 비극이 융성했을 당대의 시대정신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르네상스를 지나며 인간은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진입하게 되는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도 뭔가 상상과 현실이 뒤섞이는 메타적 상황인 것 같아 흥미롭게 느껴진다.



근대적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신탁을 듣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서 운명은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현대인은 자기 의지대로 삶을 살고 있나? 어찌 보면 합리성의 끝판왕인 과학적 예측이 요즘 시대에는 인간에게 제시된 새로운 신탁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더군다나 인공지능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실제적 존재로 우리 삶에 어마무시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 말이다.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인공지능 특이점, AGI’에 대한 뉴스는 매우 혁신적으로 예측된 미래로 볼 수 있다. 다수의 인공지능 과학자들은 인공지능의 특이점이 10년 안에 올 것이라고 말한다.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는 특이점 이후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성을 어른과 아이로 설명한다. 초지능의 AI는 인간에게 더 이상 자신의 결정에 대해 허가받지도, 구구절절 설명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인간은 어차피 인공지능의 설명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예상하는 특이점 이후 세계는 거의 SF 소설 같은 것이었다. 이를테면 정치 구조는 봉건제로 회귀할 것이며, 최소한의 기본 소득을 받으며 엔터테인먼트에 몰두하는 것이 미래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앞으로 10년 동안은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보면서 플랜 B를 준비하라”는 다소 회색톤이 느껴지는 알쏭달쏭한 조언을 남긴다.


기술과 권력의 변화 속에서 인간이 자신의 한계와 운명을 마주해야 한다는 고민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인간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을 비극을 통해 경험했다. 어쩌면 운명은 고대 그리스인이 처한 현실일 수 있다. 결국 운명에 대한 질문은 시대와 문명을 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가 인공지능과 공존하며 느끼는 불안과 흥미는 고대 그리스 시민들이 비극을 통해 마주했던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그 속에서 선택과 의미를 찾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