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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Jun 26. 2022

정원과 정원: 장 미셸 오토니에

보고 싶은 전시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평일 수업만 끝나면 미술관에 갔다. 나뭇잎이 우거진 돌담길을 걸으면 마냥 좋았다. 할아버지 한 분이 사계절 내내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셨다. 요샌 버스킹하는 사람들이 자주 오는데 오늘은 흰티에 검은 바지를 입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자리를 지켰다. 고궁과 어울리는 음악을 연주하며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빠짐없이 붙잡았다. 


<정원과 정원> 전시는 시립미술관 마당에서부터 시작된다. 미술관 앞 커다란 나무에 '황금 목걸이'가 걸려있고 입구엔 은색 매듭이 수문장처럼 서 있다. 안에는 이미 사람이 많았고 입장줄이 길었다. 기다린 줄의 꼬리에 서서 팜플렛을 펼쳤다. 들어가기 전에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분량이었고, 내용도 자세하고 친절해서 좋았다. 작품 설명은 여러 번 읽어도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아 불친절함 앞에 의욕을 잃고 만다. 그래서 작품을 먼저 보고 설명을 나중에 보는 습관이 생겼다. 해석이 어려워서도 있지만, 글을 먼저 읽으면 생각에 제한이 생긴다는 걸 깨달았다. 


<루브르의 장미>는 검은 잉크로 힘찬 생명력을,  <자두꽃>은 자주색과 오렌지색으로 꽃을 표현했다. 두 작품이 연달아 붙어있으니 조금 더 생동감이 느껴졌다. 장미를 지나칠 때쯤 도슨트의 설명이 들렸다. 이미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우리도 그 안에 끼어들었다. 인도에서 만든 유리벽돌이 벽에도, 바닥에도 깔려있었다. 파란색과 베이지색, 초록색과 갈색 등 색색의 벽돌이 퍼즐처럼 어우러져 빛을 뿜었다. 천장에서 내리쬐는 빛이 불꽃 같은 번짐을 만들어냈는데 그건 우연히 발견한 거라고 했다. 이후에는 작품을 걸 때 조명 각도를 세심하게 신경쓰게 되었다고. 하나하나 계산된 거라 여긴 것들이 우연으로 이루어졌단 걸 알게 됐을 땐 더 신비롭다. 


더욱 압도적인 건 '피로지'라는 파란강이었다. 7,000개가 넘는 유리 벽돌을 하나하나 설치해서 만든 작품으로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위엔 색색의 매듭이 달려있었는데 빛을 받은 구슬이 바닥에 깔린 파란 강에 다시 빛을 반사한다. 그래서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면 윤슬을 보는 것 같다.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작품이라고만 해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무려 수학자와 함께 만든 거였다. 수학과 미술의 콜라보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덕수궁으로 이어진 전시는 더욱 정원을 강조했다. 카페 앞 작은 연못에 황금 장미와 연꽃이 피어있었다. 금색 구슬들이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초록빛 연못과 퍽 어울렸다. 연못을 보면서 정밀아의 애심을 들었다.




아주 큰 나무 아래를 지날 땐

눈을 맞추고 손을 다시 꼭

작은 돌멩이 그마저 좋아 보였어


들국화 산딸기 패랭이꽃도

낮은 폭포와 나이가 많은 소나무

어쩌면 이리 어여쁜 걸까


예쁘다 했어 그 말도 모자라

더 고운 말을 생각하다가

그냥 한참을 바라보았네


무슨 말들이 필요하겠어

그대 두 눈에 하늘을 보네

그대 마음에 하늘을 보네


그대 두 손에 흙 내음 있고

그대 두 발은 길을 만드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가사에 다 있었다. 나이가 많은 소나무, 아주 큰 나무, 작을 돌멩이. 기타 소리 위에 낯익은 정밀아의 목소리가 살포시 올라앉았다. 이어폰을 한 쪽만 끼고 들었지만 그 순간엔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연못 위에 금색 매듭과 바람에 몸을 맡긴 버드나무만이 존재했다. 오래 전 언니와 갔던 교토 철학의 숲 같았다. 한여름이었지만 걷고 또 걸었다. 가운데엔 낮은 천이 흐르고 양쪽엔 나무가 우거졌던 여름의 숲. 목이 말라 들어간 카페에서 시원한 말차를 마셨다. 통유리로 된 창문 앞에 앉아 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땀 흘리면서 걷던 길을 에어컨 바람 아래 앉아 가만히 바라보니 절로 '좋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때도 오늘처럼 바람 따라 움직이는 나무를 바라봤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숲 사이를 지나는 모습도 보였다. 이 길을 매일 지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옆으로 한 무리의 여행객이 지나가며 사진을 찍었다. 학생들 중 한 명이 찍혔을 것 같았다. 그저 집으로 가고 있었을 뿐인데 이방인의 추억이 되어버린 거다.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이 어딘가에서 만나게 된다면 어떨까. 여행지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저녁이 찾아올 무렵 테라스 카페를 찾아갔다. 주말이라 그런지 카페 앞마당은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들뜬 얼굴을 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한 테이블씩 차지하고 있었다. 안에도 마찬가지였는데 키오스크 앞엔 사람들이 서 있었고, 주문이 밀린 건지 직원들은 분주했다. 루프탑에 자리를 잡고 한참이 지나서야 시킨 음료가 나왔다. 지난 번에 왔을 땐 오늘 간 카페 옆에서 커피를 마셨다.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자리에 앉아 머리 위에 반짝이는 전구를 바라봤다. 사실 자리에 앉으면 멀리서 보는 것처럼 환하지 않다. 최선을 다해 불을 밝히는 작은 전구알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괜히 애잔해진다. 저 작은 몸으로 애쓰는 게 안쓰럽기까지하다. 멀리서 보는 게 좋을 때가 있다. 들여다보면 그 속이 훤히 보이고, 예상치 못 했던 것들이 튀어나온다. 풍경이든 사람이든 그게 뭐든,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상상은 깨지고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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