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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Jan 13. 2022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유병록

새해 계획을 세우지 않기로 했다. 매년 사던 다이어리도 사지 않았다. 대신 작년 11월 유람 위드 북스에서 사온 연녹색 수첩을 꺼냈다. 스물 일곱의 겨울, 크리스마스를 보내러 제주에 왔다. 한창 북카페를 좋아하던 때라 버스를 타고 돌아돌아 유람 위드 북스에 갔다. 흰 건물에 큰 창 서너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동그란 안경을 쓴 따뜻한 사장님이 반갑게 인사를 해주신다. 카운터 아래는 '먹고 싶은 만큼 가져가세요'라고 적힌 귤 한 박스가 놓여져있었다. 쭈그려앉아 귤을 고르던 순간이 아직도 생각난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엔 비가 왔다. 우산이 없어 문 앞에서 우왕좌왕 하고 있을 때 사장님이 나오셔서 같이 걱정도 해주시고, 더 빠른 버스 정류장을 알려주셨다. 다정한 말과 마음에 택시 대신 패딩 모자를 뒤집어쓰고 걷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비는 금방 그쳤고, 우린 무사히 숙소에 도착했다. 3-4년만에 다시 찾은 곳은 이전보다 규모가 훨씬 커져있었다. 대도시의 서점처럼 천장도 높아지고 테이블도 많아졌다. 하지만 햇살을 받으며 소록소록 잠자는 유람이와 웃으며 맞아주시는 사장님은 그대로였다. 카운터 오른쪽 선반에는 유람 위드 북스를 상징하는 수첩과 펜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노란색, 남색, 분홍색, 연녹색을 하나씩 다 집어오고 싶었지만 하나만 고르기로 했다. 선택하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집어든 연녹색 노트와 노란색 볼펜은 비행기를 타고 나와 함께 인천으로 왔다.  


잠에서 깰 때마다 오늘이 며칠이지, 생각한다. 매년 1월은 낯설고 그렇게 어영부영 흘러간다. 학원을 다니거나 규칙이 정해진 어딘가를 가는 게 아니라면 느슨해진다. 올해 역시 그렇게 오늘을 맞았다. 10일을 훌쩍 지나 1월 중순이란 말이 어울리는 날이다. 누가 들으면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에서야 작년을 정리하고 올해를 정비해본다. 다시 열어본 작년 스케줄러엔 2021년의 100일 글쓰기를 마치고 원고를 모아 보냈다는 이야기가 써 있었다. 빼곡하게 적힌 새해 다짐이자 계획들은 여전히 다짐으로 남아있다. 한 장을 넘기자 유병록 시인의 <아무것도 다짐하지 않기로 해요>가 보였다.




우리

이번 봄에는 비장해지지 않기로 해요

처음도 아니잖아요 

아무 다짐도 하지 말아요


서랍을 열면

거기 얼마나 많은 다짐이 들어 있겠어요 


목표를 세우지 않기로 해요

앞날에 대해 침묵해요

작은 약속도 하지 말아요 


(중략)


우리 그저 바라보기로 해요 


(하략)




시 전문을 내 상황에 맞게 편집해 적어놨다. 서랍을 열면 10개가 넘는 다짐들이 들어있을 거다. 매해 다이어리를 사고 그 안에 다짐을 쏟아놓았으니까. 돌아보면 그저 글자일 때가 대부분이었다. 올해는 다시 시를 되새겨본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자고. 조급해하지 않고 무엇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로 한다. 올해는 다짐이나 큰 계획은 세우지 않기로 했다. 작은 일을 실행하는 매일을 모아 결과를 만들기로 했다. 다짐보단 실천을 앞에 세우고 꾸준하게 하루하루를 모아볼 생각이다. 연녹색 노트 앞장에 이 시를 다시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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