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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냥 Nov 08. 2019

부지런한 게으름 최적화

아침에 일어나서 준비를 하고 집에 나서서 자리에 앉기까지. 무의식적으로 계산해서 1분의 미리 도착도 용납할 수없다는 듯 몸이 움직인다. 자취를 시작했을 무렵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출근 거리를 계산하게 되었다. 


이사 후 첫날, 9시에 집을 나섰다. 9시 20분 도착. 9시 30분부터 업무 시간이 시작되기에 10분의 여유가 생겼다. 앞으로 9시에 집을 나서면 여유 있게 걸어올 수 있겠다 싶었다. 다음 날 평소보다 10분 늦게 일어났다. 세수부터 조급해지기 시작했고 상의는 나흘 전에 입었던 것 하의는 그제 입었던 것으로 후다닥 입었다. 챙길 거 챙기고 어제든 가방 그대로 들고 나서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니 도착하니 9시 29분. 1분 차로 세이브했다. 


사람이 이렇게 게을맞아질 수 있는 것인가. 아무리 어젯밤이 늦고 아침잠을 이기는 것이 괴롭더라도 왜 항상 매일 이런 쫓겨야 하는 건가 싶었다.


학생 때는 30분 전 도착해서 빈 강의실의 스산함을 느끼며 시간을 보냈는데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싶었다. 그러다 문득 졸업 후 사회에 나오자마자 느꼈다. 학생의 체질을 안고 회사 생활을 하는구나.


공공기관을 다닐 무렵이었다. 9시까지 출근이었는데 매일 9시 50분과 55분 사이에 자리에 앉았다. 실장님은 직업군인 출신으로 규칙적인 생활이 몸에 배신 분이었고, 과장님도 조용조용하시지만 잔뼈가 굵으신 분이었다. 실장님과 과장님은 30분 전에 오셔서 신문을 보거나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으신다고 들었다. 10명 가까이 되는 팀원들이 있었고, 사무실에는 항상 원두 드립 커피가 있었다. 다른 분들이 마시는 걸 본 적은 없지만, 팀의 막내가 출근해서 씻고 원두가루를 넣으면 뜨거운 물에 우러나온 커피 향이 사무실 안을 은은하게 채웠다.


어느 날, 과장님이 따로 날 부르셔서 못해도 20분 전에는 오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9시에 역으로 계산하면... 8시 40분. 지각은 아니지만 지적받은 것에 순간 부끄러웠다. 나보다 늦게 오는, 59분에 오는 대리님들도 많은데 왜 나한테만 그러나 싶었다. 그러다가 나를 위해서 한 말 같아서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오후 업무를 하던 중 어떻게 내가 오는 걸 일일이 체크하셨을까 싶었다. 파티션도 높고 직급이 높을수록 안쪽에 있는데. 바쁠 땐 댓바람부터 업무에 매진인 분들이 막내 출근 시간 백데이터를 어떻게 만드셨을까 궁금했다. 지금에서 생각하면 누구나 안 보는 척, 안 듣는 척하면서 보고 듣고 평가하는 걸 느끼고 나도 그렇게 하고 있단 걸 알게 되었지만. 


그때 내가 내린 결론은 원두커피 타이머였다. 내가 올 때까지, 내 업무 영역을 존중하기 위해 아무도 만지지 않았던 드립 커피 머신의 힘이랄까. 9시 또는 9시 넘어서 퍼지는 커피 향기에 ‘아, 쟤 오늘도 또 아슬아슬하게 왔네.’라는 시그널을 만든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원두커피 향이 사무실을 메운 것처럼 과장님의 조언도 허공에 흩날렸다. 8시 40분까지 오려고 노력했지만 연초 계획이 흐지부지 되듯 조언 다다음날부터 다시 8시 55분에 착석했다. 말 안 듣는 사원이 된 것 같아서 눈치가 살짝 보였지만 본의 아니게, 기상 시간은 당겨지지 않았고 매번 같은 시간에 현관문을 열었고 지하철을 탔고 사무실에 앉았다.


그 회사, 이 회사 구분 없이 모두 평등하게 1분 세이브로 착석하는 회사생활을 하며,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는 것과 저녁에 늦게 자도 어제와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능력인지 새삼 깨닫는다.


사회 초년생 시절 금요일 새벽 3시에 자면 토요일 오후 6시에 일어났다. 중간에 깨지도 않고 화장실도 가지 않은 채 말이다. 일어나서 졸린 눈을 비비고 세수하고 나서 밥을 먹으며 무한도전을 봤다. 과한 수면에 걱정하던 가족들도 몇 주 지나니 굳이 깨우지 않았다. 빛의 속도로 사라지는 주말이 안타까워 어학원을 등록하려 했다. 오전반을 들으려 했지만 수강생이 많아 오후 2시에 시작하는 강의를 신청했다. 매주 토요일 머리를 다 말리지 못한 채 10분 늦게 들어갔고 오후반을 추천해준 선생님에게 항상 고마웠다.


기상시간뿐만 아니다. 방에는 좌식 소파와 베드 트레이가 있고 침대 위에는 누워서 동영상이나 전자책을 볼 수 있게 거치대가 설치되어 있다. 전자책 기기는 정자세로 넘겨보고 싶어서 리모콘도 들였다. 노트북 충전기가 무거워서 아이패드를 샀고 키보드가 추가되더니 이내 마우스까지 사들이면서 노트북의 자리를 위협한다. 난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주변인들이 경악했던 건 중 하나는 누워서 과자도 흘리지 않고 계속 먹을 수 있다. 이렇게 야금야금 사거나 행한 것들을 모아보면 몸 움직임을 적게 하는 것들 뿐이다. 무의식에는 수면 시간은 최대화 이동은 최소화가 내재되어 있는 걸까? 학생 때의 나의 그 부지런함은 어디로 가버리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게으름에 최적화되는 건지 의문이다. 아예 잠이 많아서 회사까지 지각하는 거면 그냥 자포자기할 텐데 아슬아슬하게 맞춰서 일어나는 모양새를 보니 묘할 뿐이다.


그래서 부럽다.


원하는 시간에 딱 맞춰 일어나는 분들과 아무리 늦게 자도 기상 시간은 칼같이 지키시는 분들 말이다.


정말. 정말. 오늘도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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