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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냥 Nov 21. 2019

가지가 없어도 잎은 돋아난다

맑고 푸른 가을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겨울이 올 것 같다. 거리가 은행잎으로 뒤덮이고 잘못 밟아버린 은행에 강렬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쌀쌀한 날씨에 코트 자락을 여미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노란 양탄자를 깐 듯 예뻐 보였다가 환경 미화원분들을 떠올리면 이런 생각이 가당키나 하나 싶다가도 나 홀로 낭만에 빠지게 된다.


버스정류장에 갈 때 짧은 설렘과 안타까움이 교차할 때가 있다. 집 근처의 횡단보도는 빨간 불 신호가 긴 편이라서 마냥 기다리다가는 타야 할 버스가 휙휙 지나간다. 그래서 횡단보도 앞에 딱 도착했을 때 파란 불로 바뀌면 조금 신난 상태가 된다. 타야 할 버스가 신호에 걸려 있는데 때마침 파란 불로 바뀌면 이거야말로 또 횡재한 기분이다. 반면 방금 신호를 놓쳐서 기다려야 하는데 타야 할 버스가 슝~하고 지나가버리면 10분을 기다려야 할 생각에 낭패를 본 기분이다. 좋아하는 음악 2번 돌려 들으면 버스가 오니까라며 위안을 삼아 본다.


횡단보도로 가는 길에는 은행나무를 심어놨다. 그날도 헐레벌떡 뛰어갔지만 신호를 놓쳐서 인도 주변을 서성이며 돌아다녔다. 오가는 자동차를 보다가 나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수많은 결들을 당당하게 드러낸 은행나무를 보는데 줄기에 잎이 나있다. 가지가 없이 은행잎 몇 장이 포개져서 줄기를 뚫고 나와있었다. 신기하다. 신기해하면서 스마트폰을 들이밀어 사진을 찍었다.

가지가 없어도 잎은 난다! 내가 찍은 사진

그 사진의 존재 자체를 잊고 살았는데 최근 우연히 다시 봤다. 나무는 제가 살기 위해 잎을 냈을 텐데 나에겐 그게 그렇게 또 좋을 수 없었다. 가지가 없어도 잎이 돋아난다. 비록 부모님은 제대로 역할을 못 했지만 나란 사람도 언젠간 움틀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단한 칭찬이나 상을 받는 기분이 아니라 차가운 두 손에 장갑을 쥐어주면서 할 수 있다고 북돋아주는 느낌이랄까. 현실보다 암담한 미래를 생각해버리고 말 때 줄기 뚫고 나온 대견한 은행잎들이 나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훠이훠이 멀리 날려 보내주었다.


버스는 놓쳤지만 그 순간이 참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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