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기 합리화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걸 깨달았다. 첫인상만큼 마지막 인상도 중요하다는 것. 다시 볼 수 있는 상대라면 언젠가 만회할 기회가 오지만, 회사라는 건 그렇지 않다.
정말 영혼의 단짝(이하 “영단”)을 만나도 회사가 중간에 껴있으면, 그 사람은 퇴사한 회사를 떠올리게 하는 버튼이 된다. 이때 내 감정은 두 가지로 흘러간다. 하나는 부정적인 생각을 견고하게 만든다. 참 거지 같은 회사 아직도 그 모양이구나. 나오길 잘했지.
하지만 기억과 시간은 우리의 과거를 미화시키고 견딜 수 있었음직한 걸로 만든다. 거지 같은 회사는 어느새 ‘거지 같은’이라는 수식어를 탈락시키고 ‘직장’ 혹은 ‘나름 괜찮았던 직장’으로 탈바꿈한다. ‘매일 12시, 새벽 1시까지 일하는 건 최악이었지만 대리님은 진짜 좋았는데.’ ‘진짜 내가 그 인간 때문에 나왔지. 어휴. 그래도 연봉은 그럭저럭이었는데.’
‘그래도’ 혹은 ‘그것 빼면’이라는 말이 추가된다. 이후 괜찮았던 회사를 왜 때려치웠을까란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데 그 회사를 다니고 있는 영단을 만나 회사의 소식을 접하면 묘한 기분이 든다. 그때 내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그래서 퇴사라는 수단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걸 깡그리 잊고.
하지만 이런 영단을 만날 수 있는 건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퇴사와 함께 전화번호부에서 삭제해야 하는데 귀찮아서 남겨두는 사람들이 된다.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 지인 이하 생면부지 이상. 다시 볼일 없으니까. 그러니까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얼굴을 볼 때만큼은 웃게, 아니, 서럽지 않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퇴사를 하면서 서러웠던 날, 특히 퇴사 당일에 서러웠던 일 중 베스트는 내 퇴사날 승진을 단행했을 때다. 언질을 해둘 건 그 회사는 대표 한 마디면 그날로 승진하는 그런 곳이었다. 이제는 남이 될 나를 빼놓고 모두가 회의실에 들어갔다. 심지어 다른 부서 사람들까지. 갑자기 회의실에서는 탄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축하한다는 말, 파티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연이어 또렷하게 들렸다. 무슨 일인가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거렸다. “이제는 김 대리라고 불러야겠네!”라는 말이 귓가에 박히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내가 걔 때문에 관두는데, 걔를 승진시키냐. 그것도 하필 오늘!
(그 아이는 대표의 딸이었다.)
비참한 마음을 안고 건물 밖으로 나오자 갑자기 다른 팀 팀장이 쫓아 나왔다.
“근데 왜 관두는 거야?”
내가 이제는 대리가 된 걔 때문에 나오는 걸 알고 있으면서 떠보는 심산이었다.
“다른 부서 보내달라고 하지, 왜 관두는 거야?”
“정말 다른 이유 없어?”
그 회사는 지금도 부동의 ‘최악의 퇴사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들어 2위가 추가되었는데 맥락은 같았다. 내 퇴사날 나의 동료를 불러 조만간 승진시켜주겠다고 했다. 여기는 1위보다는 체계적인 회사라서 하루아침에 승진을 시킬 수는 없는 곳이다. 2위가 추가되자 자연스레 1위도 떠올라서 열이 받았다.
분노의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승진을 시키는 거, 남은 사람들에게 보상을 주는 것 모두 좋다. 그런데 왜 하필 그걸 내 퇴사날, 굳이 나한테까지 알리면서 하는 걸까. 나쁜 사람들.
하지만 나도 나이와 함께 자기 합리화 방식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예전의 나는 ‘X발’하면서 찔금 눈물을 흘리는 정도였다면 지금은 다르다.
먼저, 병원에 다니고 있는 만큼 의사와 상담을 통해 대화하며 한번 털어냈다. 두 번째는 이렇다.
‘그만큼 내가 이 회사에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내가 나간 만큼 남은 이들에게 후폭풍이 크기 때문에.’
남은 사람들에게 보상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거라고 여겼다. 물론 나에게 그것을 알리는 치졸한 방법은 아직도 조금은 납득하기 어렵지만 말이다. 이런 생각에 다다르자 무거웠던 감정이 서서히 사라지고 부정적인 감정에 매몰되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 뻔뻔해진다고들 하는데, 내가 살려면 최소한의 뻔뻔함, 때로는 멋있게 자기 합리화라는 단어로 포장되는 것도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비록 회사의 끝인사는 매너 없지만 나는 그 회사에게 멋있게 끝인사를 한다. 그럼으로써 내가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주고 나 자신에게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