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옷을 직접 입어보고 사는 편이다. 온라인 상의 사진만 보고 상상했던 옷은 실제로 받아보았을 때 같은 듯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라고 쓰고 매번 실패했다고 읽는다)
그래서 백화점에 간다. 백화점은 구성품목뿐만 아니라 성별, 나이대별로도 층이 나뉘어 있다. 나는 대개 '영캐주얼'이라고 쓰여 있는 층을 자주 방문했다. 이십 대의 나에게는 '영'이 적절했고 '캐주얼'도 좋았으니 '영캐주얼'은 완벽했다. '여성'이라고 표시된 층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올드한 느낌에 어쩌다 엄마 선물 사드릴 때나 가끔 들리는 곳이었다.
그런데 요즘 부쩍 예쁘다 싶은 옷이 영 보이질 않는 거다. 매장을 몇 바퀴나 돌아도 구매욕구가 들기는커녕 한 번 입어보기나 할까 하는 것도 없었다. 되려 이상한 생각만 자꾸 들었다. '이게 옷인가 커튼인가, 식탁보인가?', '만들다 만 건가?' 내가 더 이상 '영'하지 않아서인지, 유행을 따라가지 못하는 나의 부족한 패션 센스 때문인 건지, 아님 둘 다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빈 손으로 백화점을 나서는 일이 많아졌다.*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미니멀리즘'을 접하고 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으면서 옷차림에도 점차 그 영향이 미치는 중이었다.(가방 없이 출근하는 여자) 옷을 선택하는 기준을 새로 정립하면서 만나게 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언제나'인데, '10년 후에도 이 옷을 입을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들지 않는 옷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내가 옷을 고르는 구체적인 기준은 다음의 세 가지다.
어떤 옷과 코디하더라도 잘 어울릴 것, 질이 좋을 것, 가격이 합리적일 것.
옷의 가지 수가 적기 때문에 일당백을 할 만한 옷을 골라야 했고 그렇게 고른 옷은 오래 입을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영캐주얼' 패션은 어떤 기준도 만족하지 못했다. 거즈처럼 얇은 원단, 레이스와 프릴, 여리여리를 부르는 어깨선의 위치와 소매 길이 등 유행을 반영한 독특한 디자인의 옷들은 어디에나 어울리지 못했고 오래 입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특별히 저렴한 건 더욱 아니었다.
결국 난 '영캐주얼'에 백기를 들고 '여성'패션 층으로 향했다. 내가 생각한 기준을 얼추 만족시키는 옷을 발견했으나 구매까지 가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 소재며 디자인이며 좀 더 나아보이기는 했지만, 그에 비례한 듯 가격이 전혀 합리적이지 못했다.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나 보다, 하고 비싼 값을 치르며 몇 벌을 구입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여성'패션 층에 가지 않는다. 획기적인 대안을 찾았기 때문이다.
바로 '남성'패션!
옷 중에서도 셔츠를 특히나 좋아하는데, '영캐주얼'과 '여성' 어디에서도 내가 생각한 셔츠는 찾지 못했었다. 어깨선이 제자리에 있는 셔츠를 찾았다 해도 색상 구성은 많아도 두세 가지 정도고, 박음선이 부실하거나 재질이 탄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성'패션 매장의 Unisex 셔츠 라인은 나의 기준을 모두 통과하는 옷들이 즐비했다. 똑같은 면 100%인데 어쩜 이리 짱짱하고 박음질도 튼튼한지! 심지어 한 제품에 색상만 열댓 가지가 넘어 하나만 고르기가 너무 어려웠다! 더불어 여성의류 특유의 '라인'이라는 게 없으니 편한 것으로도 최고였다. 더 감동적인 것은 이런 멋진 퀄리티에도 가격은 굉장히 합리적이었다는 것!!!
아무리 Unisex라 해도 '남성'패션인데, 핏이 영 이상하지 않을까? 아빠 옷 입은 것 같은 촌스러움이 있지는 않을까? 앞선 걱정은 접어두길. 오히려 여성용으로 나온 셔츠보다 더 세련되고 더 감각적이다.
기본템을 찾는 미니멀리스트여- 요즘 옷들 죄다 왜 이러냐고, 도대체 뭘 입으란 거냐고 분노하지 말고 일단 '남성'패션 매장으로 가서 한 번 입어보기나 하자. 신세계가 열린다!
(내 옷 사고 남친 옷 사고, 아빠 옷 사고, 남편 옷 사고, 아들 옷 사고... 일석이조, 삼조, 사조, 오조...)
*특정 백화점이나 브랜드를 비하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