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일

1. 증발_1

by 원유

사랑의 증거는 무엇인지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아마도 삶이라고 하는 살아감과 그 반대편에 있는 죽음이라고 말할 것이다. 굉장히 추상적이고 막연한 답변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사실 무엇이든 살아감과 죽음을 겪는다. 그것은 여름밤을 방황하는 한 마리 모기도, 온 세상 역사에 획을 남긴 이름 높은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일단 살아감을 얻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 내가 정의 내리는 사랑은 누군가가 누구에게 이유 없이 긍정의 작용을 주는 것이다. 사랑의 속삭임이건, 도움의 손길이건, 안쓰러운 미소건 아주 거대하거나 미세하거나의 차이지 이것들의 본질은 사랑이라고 나는 정의한다. 살아감을 위해서는 긍정의 작용이 필요하다. 긍정의 작용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이가 있을 수 있지 않느냐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모태에서 나와 무엇의 도움도 없이 생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래서 살아간다는 건 사랑의 증거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모기 한 마리가 내 앞을 날아간다. 이 모기를 죽이지 않는다면 나는 이 모기에 물려 가려움을 겪을 것이다. 나는 모기약을 뿌린다. 모기는 운 좋으면 어미가 남긴 사랑의 증거로 인해 살아남을 것이지만 운이 나쁘다면 죽게 될 것이다. 내가 앞서 죽음도 사랑의 증거라고 말했던가? 어떤 인간의 고귀한 희생이나 흔적이 사랑의 증거가 될 수야 있겠지만 모기의 죽음도 사랑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아무렴 모기의 죽음도 사랑의 증거가 될 수 있다. 모기뿐 아니라 어떤 무엇이든 죽음은 그 자체로 사랑의 증거가 된다. 죽음의 증거는 살아갔음이기 때문이다. 죽은 모든 것들은 살았었고 살았던 모든 것들은 사랑받았었다. 그것이 깊건 얕든 간에.


깊은 사랑의 시대가 지나고 얕은 사랑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누군가는 말했었다. 그렇다고 깊게 사랑하는 사람이 아주 멸종하진 않았겠지만 적어도 낭만이라는 개념이 오글거림이라는 표현으로 대체되었을 때부터 사람과 사람들은 서로간 어색함을 넘어 감정이라는 것에 콘돔같은 막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이건 유명인의 탓도 아니고 정치인의 압제도 아니며 질병 때문도 아니었다. 새 시대가 빚어낸 현상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어떤 과정에 반작용 때문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내 생각엔. 그냥 이건 일어난 것이다. 가끔 공상과학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우리는 지구처럼 생긴 큰 세포 안에 들끓는 미생물도 아니고 미지의 행성의 주파수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도 아니다. 우리는 그저 1과 0이다. 살았다가 죽는다. 그뿐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수 천만년이나 그 이상이 지나면 기존에 있던 패턴의 벽을 초월해 새로운 패턴이 나오는 것이다.


살았다가 죽는다. 사람들은 사랑한다. 예전만큼 깊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흔치 않다. 사람들은 연애하지 않기 시작했다. 당연히 결혼도 하지 않기 시작했다. 출산도 하지 않았다. 출산율이 급감했다.


그러다가 0이 되었다.

1이 아닌 0. 0.몇프로도 아닌 제로가 된 것이다.


이건 인간의 의지로서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어느 날부터 신의 의지가 인간에게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전 인류의 임신이 멈췄다. 영화 <칠드런 오브 맨>에서 나온 설정이 그대로 이뤄지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경악했지만 최첨단 시대에 벌어진 대형 역병을 마주했던 인류는 신의 의지를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언제나처럼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사랑의 증거를 지켜내기 위한 인류의 노력이 있었고 결국 방법을 찾았다는 한 인간은 온 인류의 축하를 받으며 카메라 앞에 섰다. 들뜬 가슴을 진정시키고 웃으며 발표를 시작하던 그는.


갑자기 카메라 앞에서 증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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