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일

1. 증발_2

by 원유

맥락상의 표현이거나 특수효과가 아니었다. 기자회견을 하던 박사는 카메라 앞에서 갑자기 삭제되듯 사라져 버렸다. 방송에서 그렇게 보였고 실제로도 그랬다. 사람들은 혼란스러워 했고 여러 음모론이 퍼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했다. 여러 정황을 생각해 보고 이런 저런 합리적인 의심을 해보아도 진짜 사라진 것이 맞다. 사라져 버린 것이면 죽어버린 것이었을까? 사람들은 기자회견을 하던 박사가 증발한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한 뒤엔 그가 왜 갑자기 증발했을까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말해선 안되는 사실을 이야기하려 했나. 아니면 사라지고 싶었나.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사라진 건가? 대부분의 인류 앞에서 보란 듯이 첫 증발이 시작되었고 사람들이 술렁이고 있을 때 두 번째 증발이 일어났다. 첫 번째 증발이 일어나고 일주일 뒤, 여러 나라에서 10명의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증발했다. 환경 이상론, 다중 세계론, 징벌론 등 다양한 주장들이 나오는 가운데, 또 일주일 뒤 전 세계 여기저기서 백여 명의 사람들이 증발했다. 증발된 사람들이 백여 명이 되자 사람들은 이 증발 현상을 단순히 음모론이나 괴담을 넘어 생존의 위협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그 다음 일주일 뒤엔 천여 명이 증발, 그 다음 일주일 뒤에는 만여 명이 증발,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세상은 대혼돈에 빠졌다. 더 이상 사과나무를 심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도 하고 사이비 종교가 국가 권력을 초월하는 나라도 있었다. 하지만 한 주, 한 주 지나며 증발한 인구수가 세계 인구의 50%가 넘는 시점에서인가부터 들끓던 열기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것일까 차분해 진 걸까. 어쩌면 차분해 진 건 겁에 질려서 일지도 겁에 질린 건 차분해져서인 걸지도 모르겠지만 시끄럽던 세상은 어느새 차분해 지고 나름에 질서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증발에 겁먹은 인류가 시위와 폭동과 전쟁을 멈추며 애써 이성을 찾고, 증발 후를 준비하게 된 시점에선가부터 증발되는 사람들의 숫자는 줄기 시작했다. 하지만 증발되는 주기는 앞선 주기보다 더 길어지기도, 짧아지기도 하며 불규칙적으로 변했다. 그래도 증발되는 사람들의 숫자는 전보다는 적어졌다. 다시 보게 될 태아의 울음소리를 기대하고 있던 인류는 태아의 울음소리는커녕 언제 내 옆 사람이, 혹은 나 스스로가 증발하게 될지 모르는 막연한 두려움에 잊혀졌다.


어제 뉴스에 따르면 전 세계의 인구는 증발 현상 이후로 1/3가량 남았다고 한다. 2/3의 사람들이 죽은 것인지, 아니면 어딘가에서 살아가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현실이 지옥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그들이 부디 천국 같은 곳에서 살고 있길 바랬다.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혈흔이나 유골 등 정황상 그들이 죽음을 맞았다는 증거는 없다.


나는 도심 지구대에서 근무하고 있는 경찰관이다. 내가 근무하는 곳은 유독 인구밀집도가 높았던 곳이기도 하고 유흥가에 불법체류자 비율도 많은 곳이라 원래 같았으면 거의 매일 지옥같은 나날들이었지만 요즘엔 꽤나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강력사건은 몇 달째 일어나지 않고 있고 가끔 큰 사건이라고 하면 주취자들 간에 싸움이나 증발에 대한 어떤 생각에 따른 극단적 선택이다. 이 두가지 일들도 몇 달동안 꾸준히 하락세다. 증발현상 이후로 너무나 온순해진 사람들을 보며 처음엔 신의 인간 길들이기가 성공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신이 인간들에게 너무 큰 충격을 주어 인간들이 화라는 감정을 상실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화라는 감정이 사실 필요한가? 예전 누군가는 화라는 감정이 동기부여의 자극제가 된다고도 했던 것 같지만 화라는 마약성 감정 말고도 동기부여의 자극제는 널리고 널렸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화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누가 놀려도, 누가 비난해도, 심지어 누가 때려도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화를 내는 사람들이 이상하거나 웃겨 보일 정도. 마치 술을 마시지 않은 사람이 취한 사람들을 보고 느끼는 감정같은 태도로 이 세상을 살아왔다. 증발 현상이 시작되기 전, 사람들은 너무 화가 나서 터져버릴 것만 같았고 나는 그 모습들이 재밌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진짜로 터져버리자, 나는 이 현상이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며칠 전인가 오순경과 순찰을 돌다가 이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오순경은 나에게 뜬금 사이코패스가 경찰이 되면 좋은 이유에 대해 말하며 나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오재연 순경은 좋은 경찰관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오순경이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의 차이에 대해 착각을 하는 것 같아 설명해주려고 했는데 뜬금 오순경이 증발해버려 설명해 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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