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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수아 Feb 09. 2023

서울에 눈이 내린다.  한택수 시

서울에 눈이 내린다


                                                          한택수




서울에 눈이 내린다.

나는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듯

서울 하늘에 미립자(微粒子)처럼 흩어지는 눈을

나직이 흐느끼는 눈을

바라본다.

눈은 서울의 얼굴에 꽃잎 자국을 새기고

웃고 손을 건네는 연인들의 옷깃에도 자국을 내고

무언가 잃어버린 듯 뒤돌아보는 남자에게도

그 남자의 머리에도 손을 얹어 준다.

눈이 내린다.

하얗게, 하얗게 쏟아지는 눈은

눌린 마음, 성난 심정, 쓰라린 가슴들에 여린 물기를 얹어주며

소곤거린다.

눈이여, 라고 내가 소리치면

마치 대청봉(大靑峰)을 에워싼 산들처럼

추억과 욕망은 엎드리고

이제 나를 아는 나이가 되었다고 뇌이면

눈은 소리 없이 더 내린다.

눈 속에서 꿈꾸는 사람들이 아직 있을 것만 같다.

이젠 꿈을 가질 수 없는 이에게도

눈이 내리듯

눈 속에서 삶, 사랑, 죽음, 이별......

그 산문시(散文詩)의 눈을 맞는 사람들이 있을 것만 같다.

눈이 켜켜이 내린다.

내일 아침 나는 매지봉(梅枝峰) 중턱 샘가에 올라 보리라.

거기서 한 바가지의 샘물을 마셔 보리라.

삶은 의미 없는 것인가.

시는 의미하지 않고 존재해야 하는가.

라고 한 바가지의 샘물을 마셔 보리라.

어제의 날들이 뒤뚱거리며 멀어져 가고

끝없던 연습, 시련들, 그 좌절들이

그 많은 죽음들처럼 사라져 갔고

또 밀려온다.

눈은 사회면 1단 기사처럼

조용히 내리고

나는 시를 쓴다.

삶과 죽음이 끝나지 않았듯이

내겐 아직 가보아야 할 산과 언덕이 있다.

삶과 죽음이 끝나지 않았듯이

내겐 아직 지켜야 할 시간과 약속이 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시를 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파도가 밀려왔다.

그 많은 전쟁들이 끝났고 바람이 불어왔다.

시는 존재해야 하는가.

시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눈이 수부룩이, 수부룩이 내린다.

수부룩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나는 시를 쓰고

시는 나를 말한다.

서울 하늘에 눈이, 눈이 내린다.


 

문학사상(1999년 2월호)

사진 : 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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