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쌀 두 자루가 올라왔을 때도 연락이 없었다. 그저 택배 아저씨가 집에 있냐고 묻는 전화에 있다고 대답만 했었다. 우리 애들 중 누군가의 물건이 오는 줄 알았다. 딩동 소리에 나가보니, 쌀이 두 자루! 깜짝 놀랐다. 남편에게 카톡을 해보니 남편도 연락을 못 받았다고 했다. 싸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아주버님이 많이 힘드시구나, 하는 느낌! 그냥 받아들이고 잘 사시길 바라고 있건만, 아주버님의 괴로움이 짠하게 따라왔던 하루였다.
어느 날 아주버님으로부터 남편에게 연락이 왔단다. 시골 논이 팔렸으니 서류와 인감도장을 챙겨서 집으로 가지고 오라는 카톡! 형제간의 다정다감함이 없어 늘 불편해 보이던 두 사람! 결혼 이후 명절에 두 사람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친정의 오빠들 모습과는 완전히 반대였으니 더 그랬을 것이다.
"좀 노력을 해봐. 이제 어른이잖아. 좀 살갑게 굴면 점점 관계가 나아지겠지."
내 말에 남편은 그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아버지의 부재로(평생 시골 요양생활) 엄하게 동생들을 다스렸던 맏이, 집안의 상처를 가장 무겁게 느꼈을 맏이! 내 남편에게 아주버님은 형이 아니라 무서운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런 아주버님이 나에게는 따스한 시아버지셨다. 항상 응원해 주시고, 고맙다 하시고, 자랑스러워하시던 아버지의 모습! 그분이 계셔서 난 든든했다. 어머님이 그 집에 가서 내 험담을 하면 불같이 화를 내셨다고 형님이 종종 내게 전해주셨다. 그런 말은 안 하셔도 되는데 말이다. 모시는 며느리를 배려하지 못한 행동이었는데, 우리 형님은 주기적으로 하셨다. 나를 약 올리기라도 하듯.
맏이로서 자식과 같이 살고 싶어 하는 어머님을 모시지 못한 아주버님은 아내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인정했고 내게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셨다. 아주버님은 내게 하실 만큼 다하신 분이셨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할아버지가 손주를 사랑하듯 그렇게 많은 사랑을 주셨다. 난 아주버님이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어머님이 암 투병하시던 때부터 계속 이상한 일들이 발생하더니, 장례식장에서까지 이해불가의 행동들이 이어졌다. 어머님 삼우제 돌아오는 길, '이젠 모든 명절과 제사를 따로 지내자'는 형님의 그 말이 마지막 정점을 찍고 말았다. 그 어색함과 불편함에 아주버님도 점점 멀어져 갔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장례식 부조금 분배 때 한 번, 그리고 시골에 계시던 아버님 산소를 어머님 납골묘로 이장하던 때, 이번 땅 파는 문제로 세 번째 만남을 가진 두 형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저 잘 사시길 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