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수아 Dec 23. 2023

중년의 이별 준비

사진 : 내가 그린 파스텔화




또래 친구들 중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은, 아빠가 튀김집을 하시던 '기화'라는 이름의 여자아이였다. 나는 그 집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집안 곳곳에 튀김 냄새가 잔뜩 배어있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생일 때도 굉장히 말랐던 아이는 얼굴이 유난히 창백했었다. 그때 이미 백혈병이 있었던 것일까?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는 소식에 이어 얼마 후에는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실감 나지 않았던, 친구의 첫 죽음이었다.


여중생 때 눈이 부시게 예뻤던 아이가 있었다. 우리 반 반장이었는데, 그 아이의 화사한 얼굴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모든 걸 다 갖춘 그 아이를 우리는 많이 부러워했고, 선생님들의 편애도 그러려니, 하고 바라볼 정도로 마음씨도 착했던 아이다. 아주 친했던 친구가 아니어서, 다른 여고, 다른 대학을 갔기 때문에 중학교 졸업 이후 얼굴을 본 적이 없었는데, 대기업 비서로 근무하다 꽃다운 나이에 교통사고로 즉사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때도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 소문이었다.


교사로 세 번째 근무한 학교에서 특수반 선생님과 각별히 친하게 지냈다. 각반에 보통 한두 명씩 있던 장애아 교육을 위해서 난 자주 특수반에 가서 학생처럼 배웠다. 교대에서 배운 지식으로는 너무나 부족한 교사였기 때문이다. 그 선생님은 따스한 사랑에다 '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고 내게 힘주어 말했었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열정에 가득 찬 그녀에게 난 반했던 것 같고, 점점 절친 관계로 가까워졌다. 우리나라 특수교육 분야의 선구자 역할을 할 정도로 그녀는 꽤 유명한 교사였는데, 급성백혈병에 걸려 중환자실에 입원했을 때, '인간극장' 프로그램에 그녀의 병원생활과 장례식이 방영되기도 했다. 셋째 아이 육아휴직 중이어서, 나는 시어머님께 아이를 맡기고 매일 중환자실에 가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왔다. 말을 못 하던 그녀가 내게 해준 마지막 말은, 비뚤거리는 글씨로 노트에 썼던 "언니, 고마워요."였다. 한 번도 언니라고 부르지 않던 사람이, 죽기 전에 나를 언니라고 불러주었다. 그녀를 황망히 떠나보내고는 꽤 오랫동안 힘들었다. 벌써 20여 년이 지난 일이다.


그 이후 내 곁을 떠난 가까운 친구는 아직 없다. 함께 마음을 나누고 사는 친구들의 존재가 늘 감사하다. 특히 반평생을 함께한 50년 지기 친구들은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똑같이 하는 행동이 있었다. 마치 언젠가 먼저 떠날 사람처럼, 자꾸 남편에게 소소한 것들을 알려주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남편이 음식을 잘하는 편이라 함께 주방에 있을 때가 많은데, 이걸 넣어야 더 맛있다는 둥, 요런 건 조심해야 한다는 둥, 계속 아이에게 알려주듯 틈나는 대로 어떤 노하우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모임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친구들도 다 그런다고 했다. 결혼한 지 30년이 훌쩍 넘었고, 언젠가는 누군가 먼저 세상을 떠날 것이다. 남자 혼자 남을 경우가 이래저래 더 힘들 거라는 어르신들 말씀이, 아주 먼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을 나이가 되어 그런 것일까?  


한 친구는, 아들을 조용히 불러 "혹시라도 엄마가 먼저 떠날 경우에 아빠를 꼭 재혼시켜야 한다. 아빠는 혼자 살기 어려운 특별한 트라우마가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 한 친구의 남편은 믿을 만한 아들에게 "아빠가 혹시 먼저 떠나거든, 엄마를 잘 보살피라"는 부탁을 했다고도 한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좀 서글픈 마음도 들었지만,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그들의 오랜 시간이 느껴져 진한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저 오늘 많이 사랑해 주기. 사랑을 미루지 말고 바로 오늘, 바로 지금, 사랑하기 아닐까.




이전 12화 나와 자식에게 줄 가장 큰 선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