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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수아 Mar 20. 2024

시비분별

난 시비분별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상대방과 부딪히고 살았던 건 아니다. 특히 이기적인 사람과 얌체 스타일을 보면 마음이 많이 올라왔고, '약자를 괴롭히는 나쁜 힘'을 보면 피가 뜨거워졌다. 얌전했던 5년 차 교사였을 때, 난 용감무쌍하게도 수원에서 가장 악질이라고 소문난 우리 학교 교감선생님이, 한 선배 교사를 악랄하게 괴롭히는 걸 보다 못해 교무실로 쫓아가서 한바탕 소동을 벌였었다. 그 여자 교감은 내 친정아버지와의 친분(옆 학교 교감이라는)을 말하며 내게 그럴 수 있냐고 따졌고, 난 "우리 아버지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세요. 정말 중요한 건 사람이니까요."라고 똑 부러지게 말했었다.


남이면 서서히 인연이 끊어져도 괜찮지만, 계속 봐야만 하는 인연인 경우에는 나도 모르게 연극을 하고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표현했을 경우에 상대방이 바뀌기는커녕 나 자신이 더 상처받고 주변 사람들까지도 불편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그냥 대충 흘러가는 식으로 나를 맡긴다. 집착해서 신경 쓰지 않고, 행사에서 만나면 반가운 척 인사를 한다. 난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줄 몰랐지만 몇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하고 있어서 스스로도 놀라고 있다.


내 시비분별이 가장 심하게 나타났던 곳은 학교였다. 남의 귀한 자식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교사, 쌀쌀한 눈빛으로 아이들을 쏘아보는 교사, 좀 부족한 아이에게 사랑을 주기는커녕 '지 팔자'라고 말했던 교사까지...  사랑이 충만해야 할 학교에서, 정말 집으로 쫓아버리고 싶었던 교사들이 20년 동안에 한 열 명쯤 있었다. 내가 크게 싸웠던 사건이 한 번 있었다. 유치원에서 초등학교로 올라오는 1학년 아이들은 학교에 대한 두려움이 워낙 커서 유치원 선생님 흉내라도 내며 아이들을 적응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에 서울에서 근무했던 내 친구네 학교에서는, 근무 경력 5년 이상에다 인성이 특히 좋은 교사들을 선별해서 담임을 맡긴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거의 고학년 담임을 하다가 교사 발령을 받은 지 15년 정도 지났을 때 나는 처음으로 1학년 담임을 지원했고, 내 희망 대로 되었다.


 천방지축 아이들은 그야말로 내 정신을 쏙 빼놓았다.  수업은 네 시간이었지만, 아이들 하교 지도까지 끝내고 돌아온 1학년 담임들은  얼이 빠진 채로 커피를 마시곤 했다. 아이들 행동이 조금씩 나아지듯이 나도 적응이 되어 점점 힘듦이 덜해지던 어느 날이었다. 야외수업을 하는 날이라, 우연히 옆 반 선생님이 아이들을 지도하는 걸 보게 되었다. 그 선생님은 수수한 보통 교사와는 달리 늘 화장이 진했고, 명품 옷과 명품 핸드백을 갖고 다니며 자랑하곤 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교감이 되겠다고 이것저것 준비를 많이 하고 있어 늘 바쁘게 동동거리며 살던 사람이었다. 나는 내 옆에서 수업을 하고 있던 그녀를 보며 소름이 돋았다. 그 사나운 말투와 사나운 눈초리에 아이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 반 아이들이 정말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복도에서 아이들을 무섭게 대하는 걸 몇 번 본 적은 있었지만, 수업하는 걸 통째로 보게 되니 정말 놀라웠다.  "당신은 왜 학교에 출근하는 건가요?"라고 질문하고 싶었다. 그리고 '당신 앞에 있는 저 아이들이 누군가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고 손주'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있던 차에 그녀가 내게 매우 불손하게 대하는 일이 생겼다. 나는 그 행동에 넘어가지 못하고 불쾌함을 드러냈고, 우리는 아이들이 떠난 교실에서 언성을 높여서 싸웠다. 그리고 나는 평소에 내가 품었던 생각을 그녀에게 쏟아내고 말았다. 그녀와 우리를 말리던 동료 교사들은 많이 눌랐다. 그녀는 크게 상처를 받았고,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다음 해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서 그 이후 그녀를 본 일이 없다. 그녀가 어딘가에서 지금 교감으로 근무를 하고 있다는 말은 소문으로 듣고 있다.


​나는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웬만하면 잘 참는 사람으로 살았다. 마음에 있는 걸 바로 표현하지 않고 참다가 나는 가끔 폭발할 때가 있었다. 다행히 '거절'은 꼭 필요할 때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이해하는 폭이 좀 넓어지고 있고, '이건 아니다'싶을 때는 용기 내서 상대방에게 차분하게 대화를 청할 정도로 내가 변하고 있다.  그리고 말해도 아무 소용이 없어 보일 사람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그냥저냥 지내오고 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익어간다는 의미'라고 믿고 싶다. 그리고 그걸 가장 대표적으로 내게 보여주신 분이 바로 나의 시어머님이시다. 85세 말기 암 환자이셨을 때 어머님에게서는 고운 향기가 났었다. 그래서 어머님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던 것이다. 어머님에 대한 내 사랑이 더 애달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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