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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수아 May 12. 2024

우리 남편

64세, 희끗희끗한 머리가 제법 잘 어울려 내가 염색을 못 하게 하는 우리 남편! 저는 새치 유전인자를 타고난 집안의 딸이라 서른다섯 살부터 새치 염색을 했지만, 남편은 염색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교대에 다닐 때 한 친구의 집에 놀러 가서 알았지요. 방 세 개인 작은 우리 집이 꽤 부자라는 것을. 제가 자라온 환경이 얼마나 유복했는지를 절실하게 깨닫게 해 준 사람은 저의 남편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장학생으로 다니고, 졸업 후 세계적인 대기업에 입사해 다니고 있던 사람이라 겉은 번듯해 보였지만, 이 사람의 내면의 아이는 많이 추워 보였습니다. 제 인생의 멘토이신 아버지라는 존재가 그 사람에게는 없었고(아기 때부터 떨어져 살고 있던, 아주 가끔 만나는 청각 장애가 있던 아버지) 그 정겨운 단어인 '아버지'를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릴 때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소년 중앙'을 한 번도 사지 못했고, 공부의 보살핌을 전혀 받지 못하고 밖에서 마냥 뛰어놀던 초등생이기도 했습니다. 학교에도 가기 싫어 몇 번 빠진 적도 있다고 하더군요. 엄마는 삼 남매를 먹여 살려야 했고, 시골에 있는 남편을 주말마다 들여다봐야 했습니다. 며칠 장사로 엄마가 집을 비우면, 어린 막내는 엄마의 옷을 끌어안고 잠을 자곤 했다고 합니다. 그보다 더 어렸을 때는, 엄마가 삼 남매를 방에 두고 밖에서 문을 잠그고 일을 나간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보다 더 어린 아기였던 어느 날은, 조개를 열심히 캐던 엄마가 아차, 아기를 뉘어놓은 곳을 바라보다 바닷물이 가까이 차 온 걸 보고, 죽을힘을 다해 달려 아기를 구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직까지도 '섬집 아기'라는 동요를 좋아합니다.


아버지가 선생님이시고, 엄마는 평생 부업을 하시던 평범한 가정의 딸인 나를, 남편은 부러워했습니다. 무슨 공주님을 대하듯 했습니다. 특히 저희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이 깊었습니다. 그걸 아시는 아버지는 가난한 시절의 제자를 사랑하듯 큰사위를 전폭적으로 사랑해 주셨지요.


워낙 찢어지게 가난하게 자랐던 사람이라, 어느 날 제 절친 하나가 제게 물었습니다. 남편이 돈 쓰는데 인색하지 않느냐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런 면은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저희는 결혼하여 상대방 가족에게 돈을 드리거나, 선물을 하는 것으로 부부 싸움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저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면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두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살면서 가끔 느끼는 이해하기 어려운 습관은 있었지만, 그냥 내버려 두고 살았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새 물건을 사면 항상 붙어있는 얇은 비닐을 절대 떼지 않는 습관입니다. 시어머님을 17년 모시고 살면서 느낀, 어머님과 같은 습관입니다. 그래서 제가 결혼하기 오래전에 사놓은 의자에도 비닐이 그냥 붙어있었습니다. 결혼 후 몇 번 차를 바꾸었지만, 남편 차에는 아직도 얇은 비닐이 밑에 붙어있습니다. 처음에는 보기가 괜찮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너덜너덜해지는 비닐이 보기 싫어서 잡아뗀 적이 있습니다. 그 순간 남편은 굉장히 싫어하는 표정을 지었고, 약간의 불안감까지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님께 물려받은 오랜 습관을 그냥 지켜주기로 했지요. 남편 차를 탈 때마다 제가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되니까요.


몇 년 전, 발생한 제 발목이 부러진 사건으로, 정성스러움이 강점인 남편의 성격이 빛을 발해, 친정 식구들과 제 친구들에게 극찬을 받았습니다. 병원에서의 간병도 퇴원 후의 보살핌도 최고 수준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저희는 위기 상황임에도 서로를 더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복된 시간을 보냈습니다. 깁스를 하고 침대에 누워있던 저와 보호자 긴 의자에 누워있던 남편이 잠들기 전, 손을 꼭 잡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은 어느 영화보다도 더 감동적으로 마음 안에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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