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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수아 Jun 03. 2024

부끄러운 고백

나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로 사신 분이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시골에서 나무를 지고 나르던 집안의 막내둥이였다. 3년을 그렇게 살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경찰로 근무하고 계셨던 둘째 형님이 막내를 데리고 올라가면서 아버지의 인생은 바뀌었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중학교를 졸업하시고, 춘천으로 전근을 가신 형님을 따라 춘천으로 주거지를 옮긴 후 춘천고를 졸업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명문대라고 불리는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셨고, 수학교사 자격증을 따셨다. 동생을 자식처럼 키우셨던 형님과 형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을지 짐작이 간다.


그 당시 나라에서 초등 교사와 중등교사의 수급이 맞지 않아서, 중등교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들을 초등학교에 가서 조건부 교사를 하도록 했다. 아버지도 친구들도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아버지의 첫 발령지는 안성에 있는 고삼초등학교였고, 이어서 용인(내 출생지)에서 근무를 하시다 수원으로 전근을 오셨다. 그 이후 우리 가족은 수원에 둥지를 틀고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발령 5년 후에 중등교사로 옮기라는 공문을 받았지만, 평생 초등학교에서 근무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그렇게 사셨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던 그 비리의 학교가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발령 초기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선생님들, 이번에 동네 문방구에서 홍보해 주길 바라는 전과는 바로 이겁니다. 시험 준비 기간에 책상 위에 올려놓고, 수업 시간에도 애들이 볼 수 있도록 전과와 수련장을 손에 들고 설명도 좀 하시고..."


가장 젊은 교사였던 아버지는 회의 도중 벌떡 일어나셨다.


"가난한 중에도 아이들 교육만큼은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를 하는 부모님들입니다. 이게 아이들 앞에 선 교사들의 모습입니까?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갑작스러운 찬물에 아무도 말을 못 했고, 아버지가 근무를 하시던 기간에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학교를 옮기셔도 아버지는 그러셨을 거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서는 이 나라에 그런 부끄러운 일은 싹 사라지고 말았다.


교대를 졸업하는 딸에게 아버지는 두 가지를 당부하셨다.


"절대로 학생을 포기하지 마라. 네가 한 명만 포기하고 나머지 학생들에게 좋은 선생님이라 할지라도 그건 교사임을 포기한 것이다. 교사는 아이를 미워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아이들을 절대 편애하지 말라'였다.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아이들 마음을 다치게 하면 교육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조언은 내 가슴속에 깊이 머물렀고, 교사로 살면서 그것을 실천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 많았다. 다행스럽게도 감사한 것은 내 안에 타고난 '자동 삭제 조절장치'가 있어, 다음날이 되면 전날에 나를 무척 힘들게 했던 아이가 전혀 밉지 않았다. 밝게 웃으며 말을 걸면 아이들이 몹시 미안한 표정을 지었던 게 지금도 생각이 난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올바른 삶을 지향하는 몇몇의 간절함이 모이고 모여,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언젠가는 바위가 바위를 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역사는 때로 물줄기를 따라 무섭게 역행하기도 하지만, 진실이라는, 정의라는 올곧은 뜻은 '시간'이라는 강력한 힘에 의해 조화점을 찾게 된다. 이 얼마나 멋진 세상의 이치인가!​​



​사진 : 선운사의 아름다운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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