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들은 우리 형님은 당연한 일인데 뭘 그러느냐, 하는 여유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란 우리 아버님의 누님(아버님이 아기였을 때 업고 있다가 아기를 놓쳐, 그때부터 장애가 생겼다고 한다)과 그분의 아들과 며느리와 딸이었다. 고모님은 우리 어머님에게나 가족들에게 살갑게 대해주시던 고마운 어르신이었다.
감추려고 노력했지만, 나와 남편의 표정은 점점 어색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깎아놓은 과일도 형님에게만 권했고, 집을 떠날 때도 형님에게만 선물을 주었다. 우리 부부는 심한 모멸감에 견디기 어려웠지만, 인사를 공손히 하고 그 집을 떠났다. 새벽에 택시를 타고 수원으로 향하는 그 안에서 침묵을 깬 건 나였다.
"형님,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버님이 형님 댁에 계시다니요?"
형님은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말 속상해 죽겠어. 어머님이 거짓말로 소문을 다 내놓아서 내가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 말을 듣자마자 아주버님이 거드셨다.
"야! 그건 어머니가 너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야."
그랬다. 평생 시골에서 홀로 사셨던 아버님이 어느새 그들의 칭찬거리가 되고 있었다. 결혼 이후, 억세고 강하고 심하게 부정적이셨던 시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게 가장 힘든 일이었다면, 시골에 홀로 계시는 아버님이 나의 가장 가슴 아픈 손가락이었다. 시댁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 의식으로는 이해불가의 일이었고, 내가 시어머님 시집살이에 조금의 여유가 생겼을 때, 나는 용기를 냈다.
"아주버님, 제가 아버님을 모셔야겠어요."
아주버님과 형님 앞에서 나는 그렇게 말했다. 듣자마자 형님이 단호하게 했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동서, 그건 안될 말이야. 평생 시골에서 사셨던 분인데, 앞으로도 그렇게 사셔야지, 어떻게 수원으로 모시고 올 생각을 해?"
20여 년 전의 일인데도 그 장면이 너무나 생생해 신기할 정도이다. 듣고 있던 아주버님은, '나이 들면 자식이 고향'이라는 말을 하며 형님을 흘겨보셨다. 그걸 시작으로 나의 계획은 착착 움직여나갔다. 그 당시 우리는 전세로 살다가 방 세 개짜리 아파트를 분양받아 살고 있었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각방을 쓰셔야 하고(보통의 부부 관계가 아닌, 버릴 수 없어서 건사했던 어머님 인생의 웬수, 화상... 어머님 표현이다) 내 아이가 둘 있었고, 남편이 없는 사람으로 알고 있던 어머님의 동네 친구들이 있어서, 우리는 그곳을 떠나야 아버님을 모실 수 있었다. 하늘이 도우사, 1층에 방이 네 개가 있는, 마음에 쏙 드는 아파트를 계약할 수 있게 되었다. 삼성 부장으로 근무하던 분이 해외 발령이 났다고 시세보다 싸게 전세를 내놓은 것이다. 어머님과 남편과 함께 집을 둘러본 후에 내 가슴은 벅차올랐다. 이제 드디어 아버님이 가족과 함께 사실 수 있구나! 너무나 좋았다.
"에미야! 난 평생 남의 집 살이를 한 사람이라, 이제는 전세 싫다. 이제 처음 내 집(어머니는 우리가 결혼해서 마련한 집을 항상 그렇게 표현하셨다)이 생겨서 살고 있는데, 정말 전세는 싫다."
지금에서야 다른 방법이 떠오른다. 우리 부부가 어머니를 모시고 작은 전셋집에 살 때, 넓은 평수의 브랜드 아파트에서 살고 있던 아주버님께 그 부분을 의논해 봐도 좋았을 걸, 왜 그 당시는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그랬으면 내가 계획했던 일이 빨리 이루어졌을 텐데, 오로지 우리 몫이라고만 생각했다. 어머님의 심한 반대로 우리가 택한 방법은 넓은 아파트를 분양받는 것이었다. 그 사이 우리에게는 셋째 아이까지 생겼다. 2차 특별 분양이었기에 우리가 층을 선택할 수 있었다. 아버님께 좋으시도록 저층을 선택했고, 나는 꿈을 꾸며 행복해했다.
'퇴근 후에는 매일 아버님을 휠체어에 태우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아야지. 아버님 방에서 아버님과 스케치북으로 대화를 해야지. '쎄쎄쎄'도 해야지.'
아버님을 만날 때면 방에서 둘이 했던 놀이를 떠올리며 가슴이 설렜다. 그 사이 아버님은, 어머님이 주말 쉼터로 이용하겠다고 갑자기 집을 사달라고 해서 대출로(아주버님과 반반) 사드렸던 작은 아파트로 모셔왔다. 어머님이 자주 들러 챙기시지 않을 테고, 평생 그러하셨듯이 일주일에 한 번 잠깐씩 들르실 게 내 눈에는 보였지만 형님은 신이 났다. 두 분을 결혼시키는 것 같아 행복하다고 했다. 에효~~ 시골에서 아버님을 작은 아파트에 모셔놓고, 내 예상대로 어머님은 우리 집에 거주하시다가 주말마다 들르시곤 하셨다. 그 와중에 글 서두에 썼던 고모님 댁 방문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리고 얼마가 흘렀을까? 아버님이 아니었으면 분양받지 못했을 그 넓고도 좋은 아파트 입주 3개월 전에, 아버님은 홀로 쓸쓸히 돌아가시고 말았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나는 슬픔에 빠져 한 달을 울었다. 셋째 아이 육아휴직 중이어서 아이를 업고 매일 미사를 참석했다. 너무나 서러워서 울고 또 울었다. 너무나 죄송해서 울고 또 울었다. 보다 못한 신부님께서 이야기 좀 하자고 하시면서 내게 강하고 따스한 눈빛으로 말씀하셨다.
"자매님, 그 마음 다 알아요. 막내며느리가 그렇게 울고 있으면 아버님이 하늘나라로 못 가십니다. 이젠 놓아드리세요. 아버님이 다 아시니까 많이 고마워하실 거예요. 아버님을 위해서 이제는 울지 마세요."
신부님 말씀을 듣고 나니 마음이 좀 진정되었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아버님은 장애인이 아닌 50대의 건강한 모습으로, 넓은 기와집 옆에 있는, 폭이 아주 넓은 대로에서 환히 웃고 계셨다.
"에미야, 난 괜찮다. 그동안 고마웠다. 하늘나라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마."
청각장애가 있으셨던 아버님이 눈빛으로 내게 말씀하셨다. 그 이후 나는 긴 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아주 가끔 눈물을 흘린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