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 2학기 첫날이었다. 난 아버지의 손을 잡고 전학이라는 것을 했다. 생판 모르는 학교의 낯선 교실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앞에 세워놓고 자기소개를 하라고 하셨다. 그 말을 이해는 했지만, 내 입은 물론 내 몸뚱이 전체가 얼어버려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바보같이 울기만 했다. 그 이후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시절을 아버지와 100% 함께했던 나는, 늘 극심한 부담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 당시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은 정년퇴임을 앞둔 할아버지셨고, 학교의 거의 모든 일은 교무부장이셨던 아버지가 하셨다. 그러니 그분의 딸인 나는 모든 선생님의 관심 대상이었다. 공부도 잘해야 했고, 친구들과 다툴 수도 없었다. 아버지가 시켜서 그랬던 건 아니고,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를 망신시키면 안 된다는 나 스스로의 채찍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공부는 잘하는 편이었지만, 발표를 굉장히 싫어했다. 내가 손을 들어 친구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싫어서 아는 것도 절대 발표하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씩씩하게 발표를 했던 시간이 있었다. 3학년 때의 우리 반 연구수업! 당연히 아버지도 참석하셨다. 나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어 손을 번쩍 들고 발표를 했다. 그 순간 얼마나 마음을 썼으면 그때의 내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 학력고사에서 전교 1등을 했다. 아버지는 너무나 기쁘셔서 학교 전체 선생님과 소사 아저씨들까지 짜장면을 대접하셨다. 우리 집 형편에 짜장면 몇십 그릇은 엄청난 과소비였지만, 아버지의 기뻐하시던 그 모습이 나는 두고두고 생각이 났고, 기분이 참 좋았다.
초등학교 6년을 보내고 중학교로 올라가는데, 아무도 느끼지 못할 자유함이 내게는 꽤 컸었다. 아버지의 딸이 아닌, 그냥 '나'로 사는 일상이 내게는 선물처럼 느껴졌다. 중학교, 고등학교, 교대를 거쳐 초등 선생( 다섯 살이 되었을 때부터 아버지는 당신의 뒤를 이어 초등샘이 되라고 하셨고, 나는 아버지를 위해 초등샘이 되어드렸다)이 되었을 때, 내 부담감은 다시 시작되었다. 주변에 아버지를 아는 분들이 많으니, 행동이 또 조심스러워졌다. 특히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들과는 교육청 회의를 같이 하는 분이셨으니..
모범 선생님이 되어야 했다. 행동은 물론 복장까지. 그러고 보니, 내 초등시절의 머리 모양은 늘 단정한 단발이었다. ㅎㅎ 내가 만일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 부담감이 싫어서 빨리 직업을 바꾸었을지도 모른다.
어른들 앞에서 긴장하던 습관이 꽤 오래갔다. 학교를 퇴직하고 학교 어르신들 앞에서 굳어지던 내 세포들이, 지금은 문학 선배님들 앞에서 종종 나타난다. 습관이 참 무섭다. 일로 만나거나, 몇백 명 앞에서 강연을 해도 전혀 떨리지 않는 내가 아직도 종종 떠는 증세가 있다. ㅎㅎ
이런 모습 저런 모습이 내 안에 다양하게 있다. 가끔 싫은 모습도 있지만, 그래도 난 내가 좋다. 그래서 거울을 보면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