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동안의 내 주치의가 있었다. 그분은 우리 가족의 주치의이기도 했는데, 내가 사는 동네 한의원의 원장님이셨다. 내가 병 휴직을 하고 대학 병원을 꾸준히 다니고 있을 무렵에 알게 된 분이다. 나이는 나보다 여섯 살 적었지만, 나는 마치 아버지처럼, 은사님처럼 그분께 의지하고 살았다. 내 아픈 마음을, 내 깊은 상처를 다 알고 계셨던 원장님은 나를 다독이시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까지 제시해 주시곤 했다.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았던 17년의 고통과, 우리 어머님의 기적 같은 변화와, 그 중간에서 내 고통을 더 가중시켰던 형님이라는 존재, 그리고 나의 지나친 책임감, 그리고 종종 찾아오는 무력감까지, 난 나의 모든 걸 그분께 다 쏟아내며 조금씩 치유되는 내 모습을 보았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 나는, 원장님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원장님, 저 가슴이 너무 아파요. 한 여자의 한 많았던 일생이 이제 마무리되고 있어요. 단칸방에서 삼 남매 키우며 피눈물을 흘리셨던 어머님의 삶을, 남편 사랑 한 번 받지 못하고 사셨던 한 여인의 삶을 생각하면 너무 가여워서 자꾸 눈물만 나요."
원장님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셨다.
"선생님, 지금은 정말 중요한 시기예요. 어머님의 생을 잘 마무리하셔야 하잖아요. 그 역할을 막내 며느님이 하셔야 합니다. 육신은 죽지만 영혼은 영원한 것이에요. 어머님이 일생의 정리를 평화롭게 잘하고 떠나셔야 사후에 평온하실 수 있습니다. 엉킨 실타래를 풀고 내 인생이 감사했다는 마음으로 정리가 되셔야 합니다. 힘드시겠지만, 어머님 매일 만나러 가시니까, 그 중요한 역할을 하려고 노력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원장님의 말씀을 듣고 집으로 향하면서, 내가 아는 어머님의 일생을 잠시 생각했다. 한 많은 인생, 고생 많은 인생... 그런 쪽으로 생각이 흘러가다가 어머님이 세상에 뿌리셨던 '모진 말'들이 떠올랐다. 분가 후에 내게는 천사 시어머님이셨지만, 그전에 많은 사람들 가슴에 대못을 박고 사셨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가장 큰 피해자가 바로 나였으니까. 그리고 그 아픔이 얼마나 컸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감사하게도 깊었던 내 상처들은 어머님의 뒤늦은 사랑으로 다 치유되었지만, 현재 진행형인 분이 있음을 시누님 입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그분은 우리 어머님의 올케인데, 교사 출신으로 나를 특별히 이뻐하시던 분이었다. 어머님이 말기 암이라는 소식을 접하셨을 텐데도, 그분은 어머님께 한 번도 오신 적이 없었다. 그래도 그분 장남은 병원에 한 번 다녀가긴 했다. 우리 가족과 함께 여행도 자주 다녔던 시외 사촌 동생이어서 우리 부부와는 친한 사이였다.
신혼여행 다녀온 첫날부터 어머님을 모시고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나는 시어른들과 자주 소통하며 살았고, 어머님과 분가한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아주 오래전, 교사 출신의 외숙모님은 전화를 하셔서 집에 어머님이 안 계신 걸 확인하시고는 내게 이런 속풀이를 하셨다.
"지혜 에미야! 나 있지, 니 어머니께 엄청 깨지고 살았다. 울기도 많이 했지. 얼마나 무섭고 사나우셨는지 몰라. 아무도 못 이기잖아. 보통 성격이 아니시잖니? 툭하면 내게 그러셨단다. 내가 교사 며느리를 얻으면 손에 장을 지진다고. 그 말이 내게는 엄청 큰 상처가 되더라. 세상에.... 그런데 둘째 며느리 될 사람이 교사라는 말을 듣고 내가 얼마나 심장이 떨리던지, 전화해서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 참았다."
내가 당하고 있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악담을 하시던 어머님이셨기에, 난 보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훗날 나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너한테 배우는 학생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다고. 내가 들었던 말들 중에 가장 상처가 깊었던 말이었다
바로 그분이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어머님과 몇 년 동안 연락하지 않고 있다는 분이어서 난 그 부분이 계속 마음에 남아있었다. 나와는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였지만, 내가 섣부르게 나설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말기 암 환자로 병실에 누워계신 어머님께 나는 자주 사랑한다고, 감사했다고, 수고 많으셨다고 말씀드렸지만, 차마, 가슴 아프게 했던 인연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참회하시라는 말은 꺼낼 수 없었다. 다만 그 외숙모님이 어머님이 떠나시기 전에 한 번이라도 어머님께 다녀가시기만을 속으로 빌었다. 그러던 차에 외숙모님은 내게 전화를 하셔서 병원에 한 번 들르겠다고 하셨지만 그분이 오시기도 전에 우리 어머님은 저세상으로 떠나시고 말았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외숙모님은 어머님 장례식장에 오셔서 오래 머무르셨고, 장지까지도 우리와 함께하셨다.
참으로 파란만장했던 한 여인의 삶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내 사랑이었던 어머님은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내 가슴속에 이렇게 남아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