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2편> 너의 공간에 침투해 가는 과정
”자고 가도 돼? “ 나지막이 묻는다.
너는 활짝 웃는다.
“당연한 걸 왜 물어, 매일 자고 가도 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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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지 짐 가지고 와. 너 짐 둘 수 있는 자리 만들어 놓을게.”
아니. 자주는 안 올 건데-. 애써 웃으며 답한다.
아니. 더 이상 오지 말아야 한다.
그냥, 조금 떨어져 지내야 너도 나를 보러 올 거잖아.
나는, 네가 나를 보기 위해 오는 발걸음을 잃고 싶지 않다.
나는 붙어 있을수록 너만 바라보게 될 텐데, 넌 붙어있을수록 소중함을 잃을까 봐. 너도 나랑 함께 있고 싶어 했으면 하는데, 너는 내게 오지 않을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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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으로 내가 너에게 가는 것이 훨씬 편한 쪽이었다. 어쩌다 보니 나만 차가 있고, 저쩌다 보니 너만 자취를 했다.
결국 나는 점점, 그렇게 너의 공간에 침투해 버렸다.
자취를 처음 해 보는 네가 이 집에 입주하면서 가지고 온 짐은 달랑 이불과 베개, 수건 두 장과 캐리어 14인치에 들어갈 정도의 옷들 뿐이었다.
“등 안 아파?” 얇은 이불에서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며 물어본다.
“응, 나 바닥에서 잘 자.”
“안 찝찝해?” 욕실 슬리퍼 없는 화장실에서 맨 발로 나오는 너에게 물어본다.
“어차피 씻는 데 뭐.”
“밥은?” 식기류, 음식 하나 없는 주방을 보며 물어본다.
“글쎄. 회사 가면 다 주잖아. 나머진 시켜 먹으면 되지, 뭐.”
으이그-. 나는 너의 볼을 꼬집었다. 너는 바보처럼 ‘헤헤, 난 자취가 처음이라 잘 모른단 말이양, 네가 알려줘-’ 하며 웃어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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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자취할 때 필요한 것들을 알려주었다. 기본 적인 것부터, 필수는 아니지만 있으면 좋은 것들, 자취생 꿀팁이라며 뜨는 영상들, 너의 집과 어울릴만한 물건들의 링크를 보냈다.
하지만 그 마저도 제대로 못하는 것 같거나, 지금 살만 하지 않냐며 귀찮아하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너의 집을 직접 채워나갔다.
“너 방인데 내가 이렇게 와서 머무르는 것도 그렇고, 가구들 몇 개는 내가 사줄게.”
우리는 같이 사는 게 아니라고, 잠시 쉬어가는 손님쯤으로 남아야 우리 관계가 좀 더 소중하겠지. 생각하며 이야기해 본다.
“너 방이라니, 우리 집이지.”
너는 단호한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기분은 좋지만, 그냥 웃어넘긴다. 대답 안 하냐, 나한테만 우리 집이고 너한텐 아닌 거냐 소리를 듣지만 늘 그랬듯 주절대는 너를 귀여워한다.
그리고 그렇게 너의 공간에 내 짐도 하나, 둘 늘어났다.
"뭐 좋아해?"
"나 제육볶음. 너는?"
"난 매운 거. 진짜 매운 거."
"오늘 그러면 닭발 시켜 먹을까?"
"진짜 너무 좋아"
황홀한 듯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며 귀엽긴, 하며 너는 웃음을 지었다. 나는 네가 이렇게 웃을 때 좋아. 웃는 게 너무 예뻐서 다른 사람들 앞에선 적당히 웃었으면 좋겠어라는 욕심 어린 생각을 잠시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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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밥 내가 비빌까?"
"아냐, 내가 할게. 넌 앉아서 쉬고 있어."
너는 서툴렀다. 맛있는 음식은 만들 줄 알지만 꼭 뭔가를 만들 때마다 온갖 곳에 흘려댔다.
"미안. 내가 야무지지가 않아서 그래. 그래도 내가 해주고 싶어."
이렇게 흘리는 너여도, 날 위해 해주는 네가 너무 좋아서. 조용히 너를 안았다.
어어-. 이러면 더 흘려. 라지만 나를 뿌리치지 않는 네가 늘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고맙고 기특하다. 내 포옹으로 인해 네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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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가락질 못하네?"
"응. 고쳐야 되는데."
"교정 젓가락 사줄까?"
"이미 해봤지. 해봤는데도 잘 안되더라."
"괜찮아. 나도 23살에 고쳤어. 노력하면 될 거야."
"나중에 너네 부모님께 인사드릴 때 안 좋아하시겠지?"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부모님께 인사드릴 날이 오긴 할까. 근데, 먼 훗 날이 오더라도 젓가락질을 못하는 건 안 좋아할 것 같긴 해.
"이렇게 하면 되는데. 처음엔 어려운데, 나중엔 젓가락질이 왜 이게 정석인지 알게 될 거야."
나는 시늉을 하며 답했다.
"응. 천천히 고쳐야지."
왜인지 너의 반응은 사무적이다.
고쳐야 하는 걸 알지만 이미 그게 너의 생활이 되어버려서, 지금 사는 데에 큰 지장이 없었으니까. 현재로서는 이 방법이 네게 가장 편하니까 굳이 고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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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그렇게 안 흘리고 먹을 수가 있어?"
"어떻게 하면 그렇게 흘리는 거야?"
앞접시를 갖다 주었어도 너는 테이블 위를 빨간 국물로 더럽혀 놓았다.
"몰라. 난 턱에 구멍이 뚫렸나 봐."
너의 잠옷 바지와 상의에 묻은 국물들을 보며 내가 조금 당황했다. 이렇게까지 많이 흘리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혹시 정.. 떨어져?"
아직까진 괜찮아-, 라며 장난 어린 말투로 답했다. 그럼 괜히 애정을 갈구하듯, 미워하지 말아 주라. 라며 애교를 피우는 네가 사랑스럽다.
"나 근데 맥주 마셨더니 너무 피곤해.."
너는 침대에 기대어 잠시 눈을 붙였다. 나는 조용히 음식 그릇들을 치웠다.
근무를 마치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엊그제 먹은 음식 그릇들을 아직도 씻지 않았다.
"아직 설거지 안 했네? 날파리 꼬일 텐데."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 네가 하게끔 하고 싶지 않아. 근데, 지금은 너무 피곤해. 조금만 쉬었다가 내가 할 게."
너는 진실로 피곤해 보였다. 처음에는 내가 이 집에서 손님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사를 돕지 않으려 노력했다.
누군가의 집에 손님으로 갔을 때 손님은 가사를 도우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너의 공간에 내가 있는 것이 너에게 이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하는 거다.
하지만 설거지를 잘하지 못해 그릇에 붙어있는 양념자국들이 보인다. 시력이 좋지 않아서 설거지할 때 안 보였나 보네. 나는 손을 휘저으며 날파리 두세 마리를 내쫓는다.
그리고 피곤에 절어 침대에 뻗어있는 너를 보며 조용히 고무장갑을 꼈다. 생각해 보니 이 고무장갑도 내가 사준 거네.
그렇게 나는 집안일을 조금씩 도와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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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입주하고 청소한 적 있어?"
"아직. 근데 깨끗하니까 안 해도 되지 않아?"
.. 조용히 청소도구 살게. 라며, 청소도구를 구매했다.
"내일 우리 대청소하자. 먼지가 너무 많아. “
너는 귀찮은데, 하며 입을 삐죽였다.
나는 그냥 네가 좀 더 부족함 없는 삶을 살기를, 너 혼자 잘해 먹고 잘하고 산다 말할 수 있는 집에 살고 있기를 바란다.
그러다 보니 난 가사를 돕기 시작해, 가사를 도맡아 하게 되었다.
누가 이 집에 갑작스레 오게 되어도, 떳떳할 수 있게.
모순.
그렇게 붙어있으면서, 너의 손님을 마음대로 아무 때나 초대할 수 없을 만큼 너와 나, 우리의 공간이 되어버렸는 데 누가 이 집에 갑작스레 오게 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모순 그 자체다.
적당해야 한다는 거, 잘 안다. 그런데 점점 나 없이는 가사가 진행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내가 너에게 하는 잔소리가 잦아지고 내가 행하는 가사의 범위는 넓어져만 간다. 툴툴대면서도 너의 뒤치다꺼리를 한다.
이런 나를 너는 귀찮아할까? 아니면, 고마워할까-.
혹은, 가사를 도맡는 내가 당연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