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의 온기와 고독의 여백을 품은 공간
압구정동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한강변에 붙어 있는 거대한 단지가 나타난다.
압구정현대아파트.
한국에서 ‘부자아파트’의 상징처럼 불리지만,
외벽은 세월의 흔적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마치 명품 코트를 입었는데 90년대 디자인 그대로인 것 같은, 그런 멋(?)이 있다.
“와, 여기가 그렇게 유명한 압구정현대야?”
처음 온 친구들은 현관문 앞에서 꼭 한 번 이렇게 말한다.
그럼 나는 속으로만 웃는다.
겉모습에 잠깐 민망해진 마음도 있지만,
그 민망함을 뚫고 문을 열어준 건
결국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 안에서의 시간을 함께하고 싶어서다.
이 집을 보여주고, 이 공간을 함께 즐기고,
그 속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쌓고 싶어서.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작은 가벽.
“오, 거실 안 보이네?” 하고 놀라는 사람들이 있다.
그게 의도였다.
좌측엔 캠핑 장비, 골프백, 계절 옷까지 삼켜버리는 넉넉한 펜트리.
이곳은 말하자면 현관의 블랙홀이다.
집 안에 들어오자마자 모든 잡동사니가 빨려 들어간다.
전면에는 벤치가 있어 앉아 신발을 신을 수 있고,
우측 전신거울에 비친 나는 가끔 외출 전 마지막 ‘모델 워킹’을 해본다.
누가 보지 않아도 괜히 한 번.
(거울은 진실을 말하지만, 집 안 조명은 나를 조금 더 멋지게 보이게 한다.)
소파에 앉으면 한강이 창 너머로 흐른다.
해가 질 무렵, 강물 위로 금빛이 번지고,
도시의 불빛이 켜지기 시작한다.
여기선 혼자여도 전혀 외롭지 않다.
외로움이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결핍이라면,
고독은 스스로를 채우는 충만이다.
이곳에서의 고독은 커피와 함께 시작해서 와인과 함께 끝난다.
가끔 혼자 강을 바라보다가,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미소 짓는다.
프라이팬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물 끓는 소리…
그리고 “이거 좀 맛 좀 봐봐!” 하는 목소리.
고독은 그 순간 온기로 변한다.
현관과 거실 사이, 다이닝은 집의 심장이다.
커다란 테이블은 평소엔 둘이서만 쓰지만,
손님이 오면 6명도 거뜬히 앉는다.
와인잔 부딪히는 소리, 웃음소리, 음식 냄새가 천천히 공기를 채운다.
재미있는 건, 우리 집에 처음 온 사람들은 꼭 한 번
아일랜드 앞에서 한강뷰 인증샷을 찍는다는 것.
‘인스타용’이라면서 찍지만,
알고 보면 그 자리에서 그냥 오래 있고 싶어서다.
조명은 음식이 더 맛있어 보이게 하고,
대화는 식사를 천천히 이어가게 한다.
아일랜드 주방은 우리 부부의 소통 무대다.
아침에는 커피 머신 소리가 하루를 열고,
저녁에는 칼이 도마 위에서 리듬을 만든다.
키큰장 뒤에는 숨겨둔 간식이 있고,
브론즈 유리 장식장 속 그릇들은 늘 작은 전시회를 열고 있다.
재료를 썰면서도, 요리를 하면서도, 대화는 계속된다.
손님이 오면 아일랜드 앞이 바처럼 변하고,
혼자 있을 땐 레시피 실험실이 된다.
단, 실패한 메뉴는 잊혀진다.
(혹은 다음 날 냉동실 깊숙이 사라진다.)
하루가 저물면 거실 조명은 낮게 깔리고, 강물 위 불빛이 춤춘다.
이 집은 혼자 있어도 좋고, 사람들이 모여도 더 좋다.
고독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고, 온기는 우리를 부드럽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안다.
겉에서 본 이 아파트의 오래된 얼굴은,
이 안에 담긴 멋진 이야기와 가족들의 웃는 표정을 결코 다 보여줄 수 없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