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는 릴리즈 가드를 감는다

by 오늘비

“그 칼인가? 내 숨통을 끊어 놓을 물건이?”

의자에 꽁꽁 묶인 남자가 물었다. 앞에 서 있던 원담이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손에 들고 있던 칼을 바로잡으며 매만졌다.

‘내 운도 여기까지 인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의자에 묶인 남자는 목숨을 걸고 살아왔던 험난한 인생을 떠올렸다. 빼앗고, 죽이고, 배신하고, 짓밟고…. 모범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 살았다. 그렇게 얻은 부와 권력이었다. 이렇게 끝날 수는 없었다. 거칠게 살아오며 깨달은 한 가지. 최악의 순간에도 잘 살펴보면 어딘가 빠져나갈 구멍 하나쯤은 있다는 것. 남자는 절망하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우선 시간, 시간을 끌어야 한다.

“마지막이라 그런가? 별 시답지 않은 것이 궁금해지는군. 곧 죽어 사라질 놈에 대한 마지막 친절? 배려? 아무튼… 대답해 줄텐가?”

칼을 들고 있던 원담이 장갑을 살짝 걷어 올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계를 확인한 원담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의자에 묶인 남자가 원담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내가… 몇 번째인가?”

원담이 건조하게 답했다.

“백 한번째.”

의자에 묶인 남자가 원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비아냥 거리듯 말했다.

“그렇게나? 다들 어렵다고 하는데… 당신 업종은… 호황이군.”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후회가 밀려왔다. 비꼬는 말투가 원담의 신경을 건드린 것은 아닌가 싶어서.

“이런, 내가 괜한 말을…. 기분 상했다면 용서해 주게.”

남자의 걱정과 달리 석상처럼 버티고 서서 남자를 내려다보던 원담은 별것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호황이지. 인간은 늘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하니까. 당신도 조직의 보스이니 잘 알지 않나?”

원담이 다시 한번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본 남자가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기 위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눈을 마주치고 직접 해치운다고 하던데… 이유가… 있는 건가?”

원담의 손에 들려 있는 잘 손질된 칼날이 형광등 불빛에 푸른색으로 번쩍였다.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는 살인은… 진짜가 아니니까….”

남자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차피 죽이는 건데… 어떻게 하든 마찬가지 아닌가?”

남자 앞에 석상처럼 서 있던 원담이 천천히 몸을 돌려 뒤쪽에 있는 테이블 쪽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칼을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모두 허상이니까. 요즘은 다 디지털로 하잖아? 살인 의뢰도, 물건 사고팔기도, 사랑도, 돈도…. 처음엔 나도 그걸 믿었지. 하지만 곧 진절머리가 나더군. 지우고, 감추고, 훔치고, 가로채고…. 보이지 않으니 책임감도 느껴지지 않았던 모양이야. 게임이나 환상,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고.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깨달았지. 그건 진짜가 아니다.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느껴야… 진짜다.”

남자를 등지고 서서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말하던 원담이 잠시 말을 멈추고 손을 뻗어 테이블 가운데 놓여 있던 작고 묵직한 물건을 집어 올렸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다고 생각한 남자가 묶인 손을 풀기 위해 필사적으로 꿈틀거렸다. 잠시 끊어졌던 원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직접 의뢰를 받고 직접 죽이지. 타깃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고, 끊어져가는 숨 냄새를 맡으면서…. 총, 폭탄, 독약 따위는 흉내 낼 수 없는 진짜 살인이지. 사명감을 가진 킬러라면 당연히 지향해야 할 가치이고.”

원담이 어깨너머로 돌아보며 말하자 남자가 더 거세게 몸부림쳤다. 원담이 천천히 남자 쪽으로 돌아섰다. 원담의 손에는 수동 필름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그, 그건 뭐야! 그걸로 뭘 어쩌려는 거야?”

남자의 물음에 원담은 별일 아니라는 듯 평온하게 대답했다.

“구닥다리 필름 카메라야. 왜 필름 카메라냐고? 휘발되는 찰나의 순간이 그대로 남으니까. 만질 수 있는 실체가 있으니까. 컴퓨터 안에만 존재하는 디지털이니 뭐니 하는 것보다 훨씬 신뢰할 만한 물건이지. 자 이쯤에서 끝내볼까? 당신의 미래는… 여기까지야. 내가 잘 간직하지.”

원담이 카메라 오른쪽 상단에 달린 릴리즈 가드를 오른손 엄지를 이용해 바깥으로 제꼈다. 카메라 안에 장착된 필름을 물고 묵직하게 돌아가던 릴리즈 가드가 끝까지 제껴진 후 제자리로 돌아왔다. 필름을 감은 원담이 릴리즈 가드 옆에 달린 다이얼을 돌려 셔터 속도를 조정했다. 렌즈에 달린 조리개를 조정한 후 오른쪽 눈으로 작은 뷰 파인더 창을 들여다보며 의자에 묶인 남자의 얼굴을 향해 렌즈 초점을 맞췄다. 얼굴이 창백해진 남자가 온몸을 뒤로 젖히며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원담의 오른손 검지가 카메라에 달린 셔터를 눌렀다.

“틱, 틱, 틱….”

‘찰칵’에서 ‘칵’이 빠진듯한 소리가 날 때마다 의자에 묶인 남자는 흠칫 놀라며 눈을 감고 몸을 움찔거렸다. 이것저것 누르고 만지며 카메라를 살피던 원담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는 카메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필름 되감기를 돌린 후 뒷 덮개까지 열어 살피기 시작했다. 긴장과 공포로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던 남자가 뒤 돌아 선 원담에게 소리를 질렀다.

“빨리 끝내! 개자식아! 진짜니 가짜니 하면서 조롱하고 놀리지 말고, 그냥 후딱 끝내라고! 이, 이, 싸이코 새끼야!”

남자가 발악을 하며 소리를 치는 동안에도 원담은 개의치 않고 카메라만 살폈다. 혼자 발악하던 남자가 제풀에 지쳐 잠잠해지고 나서야 원담이 뒷 뚜껑이 열린 카메라를 들고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정말 미안하게 됐어. 오늘은 안 되겠어.”

원담의 뜬금없는 말에 남자가 당황하며 물었다.

“안 되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직도 죽이기 전에 놀릴게 남았어?”

원담은 카메라의 뒷뚜껑을 조심스럽게 닫아 테이블 가운데에 살짝 내려놨다. 그리고 다시 칼을 집어 들었다. 원담은 여전히 난감한 표정으로 남자 쪽으로 다가왔다.

“놀리다니… 그런 짓은 내 취향이 아니야. 이건 엄격한 절차야. 하나라도 빠지면 진짜 살인을 완성할 수 없거든. 카메라가 고장 나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상황은 나도 처음이야. 필름에 담긴 타깃의 마지막 순간이 진짜 살인의 가장 중요한 요소거든. 그것이 없으면 모두 무의미해지지.”

원담이 남자의 뒤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남자가 긴장해 묶인 채로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원담이 칼을 움직여 남자의 팔을 묶고 있던 줄을 단숨에 잘라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리둥절하던 남자가 자유로워진 두 팔을 앞으로 돌려 주물렀다. 팔에 감각이 돌아오자 원담의 눈치를 살피던 남자가 발을 묶은 줄에 손을 대다가 흠칫 놀라며 원담의 눈치를 살폈다. 원담은 칼을 든 채 테이블에 기대 서서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남자는 서둘러 발을 묶고 있던 줄을 풀어냈다. 원담은 남자가 하는 모양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남자를 보고 원담이 조용히 말했다.

“나가는 문은 뒤쪽이야. 잠금장치는 위에 있는 것부터 천천히 열도록 해.”

뒤를 돌아보던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저, 정말 보내주는 건가? 죽이지 않고? 이대로?”

원담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어. 처음부터 다시 하는 수밖에. 불완전한 살인은 하지 않아. 지금까지 1백 번을 반복해 온 의식이야. 카메라를 고쳐 최대한 빨리 다시 찾아가지. 그때까지 덤으로 주어진 삶을 즐기라고. 가! 말 안 해도 알겠지만 경찰이니 뭐니 하는 허튼짓은 꿈도 꾸지 말고.”

남자가 원담을 바라보며 문쪽을 향해 뒷걸음질 쳤다. 원담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남자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원담의 마음이 언제 바뀔지 모른다고 생각한 남자가 떨리는 손으로 급하게 잠금장치를 풀어냈다. 그리고 문 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열렸다. 남자는 어두운 조명이 켜진 복도를 달리면서 생각했다.

‘다시 잡힐 것 같아? 오늘 일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니놈은 나를 절대로 다시 찾을 수 없을 거야. 아무도 못 찾을 곳으로 숨어버릴 테니까. 아니, 아니지. 숨기는 왜 숨어? 저놈을 찾아내 갈기갈기 찢어 죽여야지. 넌 실수한 거야. 기다려라 개자식아!’

복도 끝에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남자는 거의 구르다시피 계단을 뛰어내려 갔다. 원담이 그림자처럼 소리도 없이 뒤따라와 조용히 옆구리에 칼을 박아 넣을 것만 같았다. 그의 징그러운 숨결이 뒷목에 느껴지는 것 같아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계단을 내려오자 맞은편에 유리로 된 미닫이 문 나타났다. 문을 거칠게 밀었다. 잠겨 있지 않던 문이 활짝 열렸다. 그 바람에 남자가 중심을 잃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낯선 밤거리였다. 인적 없는 거리에 희미한 가로등만 빛나고 있었다. 후다닥 일어선 남자가 뒤를 돌아보니 낡은 5층짜리 상가건물이 보였다. 그 옆으로 고만고만한 건물들이 을씨년스럽게 어깨를 맞대고 서 있었다.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남자가 조금 전에 뛰쳐나온 건물 2층 창에서만 창백한 형광등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건물 반대 방향으로 무작정 뛰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건물과 가로등이 있던 동네를 벗어나자 양 옆으로 야트막한 야산과 숲이 펼쳐진 어두운 왕복 2차선 아스팔트 도로가 나타났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남자가 바닥에 주저앉아 가쁨 숨을 몰아쉬었다.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틈이 없어. 따라올지도 몰라. 이 길은 도대체 어디로 이어지는 거야? 어디로 이어지든 무슨 상관이야. 어떻게든 부하들에게 연락만 하면 돼!’

안도감과 함께 조급함이 몰려들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로등도, 표지판도 없는 어두운 길은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남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머니를 더듬었다. 역시나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어느 쪽으로든 계속 가야 했다. 남자는 제가 달려왔던 방향을 가늠해 보고 반대쪽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맞은편 길 끝에서 작은 불빛이 하나 나타났다. 조용한 밤의 적막을 찢고 희미한 엔진 소음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반가운 마음에 길 가운데를 막고 서서 크게 손을 흔들던 남자가 흠칫하며 몸을 낮춰 길 가에 엎드렸다.

‘그 킬러 놈이 마음이 바뀌어 따라왔나?’

이제 막 죽음에서 도망쳐 오는 길이었다. 조심 또 조심해도 모자라다. 불빛과 소음이 점점 더 커지더니 길 가에 숨어 있는 남자의 눈앞으로 승용차 한 대가 스쳐 지나갔다. 차는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멀어져 갔다. 무심히 제 갈 길을 가는 것을 보면 추격자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제야 남자는 벌떡 일어나 멀어져 가는 차를 향해 두 손을 흔들며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차는 야속하게 멀어져 갔다. 낙담해 자리에 주저앉았던 남자가 일어나 차가 달려간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 분명 다른 동네가 있어. 거기까지만 가면 돼. 가다 보면 또 다른 차가 지나갈 거야….’

남자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채 30분이 지나지 않아 뒤쪽에서 또 다른 불빛이 나타났다. 잠시 고민하던 남자가 땅에 나뒹굴고 있던 큼지막한 돌을 주워 들고 등 뒤에 숨겼다. 그리고 길 가운데 버티고 섰다.

‘태워주면 좋고, 안 태워주면 이걸로 처치하고 차를 뺐으면 되겠지.’

불빛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남자는 돌을 들지 않은 손을 머리 위로 휘저으며 소리를 질러댔다. 달려오던 불빛이 남자를 발견한 듯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남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5미터쯤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흔히 볼 수 있는 낡은 소형 트럭이었다. 긴장한 남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운전석 창문이 열리고 작업모를 쓴 남자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트럭의 헤드라이트 불빛 때문에 운전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이고 오밤중에 길바닥에서 뭔 일이래 이게? 사람이야, 구신이야?”

거칠고 어눌한 노인의 목소리에 남자의 긴장이 한꺼번에 풀어졌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등 뒤에 감춘 돌을 단단히 그러쥔 채 남자가 트럭 쪽으로 천천히 다가서며 말했다.

“사람, 사람입니다. 길을 잃었어요. 어르신 도와주세요! 차 좀 태워주세요!”

남자의 다급한 말을 들은 노인이 운전석에 앉은 채로 물었다.

“어어! 오지 말고 거기 서서 얘기혀. 놀 데도 업는 시골 길거리서 뭐 하다 길을 잃어? 것도 오밤중에? 혹 죄짓고 야반도주하는 중 아녀?”

노인의 의심하는 말에 남자가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 나쁜 놈 아니에요. 어떤 놈들한테 끌려와서 돈이랑 핸드폰 뺏기고 여기 버려진 거예요. 안 태워 주실 거면, 대신 핸드폰 한 번만 빌려주세요. 전화 한 통이면 돼요. 한 통….”

남자의 해명에도 노인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뭐 하는 사람이여? 뭔 사람이길래 여까지 잡혀와?”

조급해진 남자가 한 걸음 다가서려 하자 노인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어허, 다가오지 말라니까….”

멈칫했던 남자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거래처 사람들이랑 술 먹고 나오다가 정신을 잃었는데… 깨보니 여기, 여기였어요. 진짭니다. 전화 한 통이면 다 확인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아니 경찰서, 경찰서까지만 태워다 주셔도 사례비, 사례비 많이 드리겠습니다. 집이든 차든 뭐든 말씀만 하시면 다 해드리겠습니다. 정말로요. 저요, 저 이래 봬도 사장이에요. 사장! 돈 많습니다!”
“사장? 돈이 많다고? 아이고, 그럼 거 뭔 아리랑인가 뭔 치긴가 그거에 당했구먼.”
“예 어르신 맞습니다. 퍽치기! 퍽치기 그거 당한 겁니다. 제가. 예!”

노인의 말투가 다소 누그러진 것 같아 남자가 한 걸음 트럭 쪽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잠시 누그러졌던 노인의 목소리가 금세 딱딱해졌다.

“내가 말했잖여. 자꾸 뽀짝뽀짝 다가오지 말라니까…. 그 등 뒤에 숨긴 돌땡이나 좀 내려놔. 도와달라는 사람이 어찌 그리 흉악한 걸 감추고 있어…. 이러니 믿을 수가 있겄어?”

노인의 질책에 남자가 당황하며 등 뒤에 숨기고 있던 돌을 멀리 던져버렸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혹시 저 버리고 간 놈들이 다시 돌아오나 싶어서….”

딸칵하고 차 문 잠금장치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이 핸드폰을 흔들어 보이며 남자에게 말했다.

“이노무 전화기는 꼭 필요할 때 이러구 밧데리가 나가. 어쩔 수 없네. 읍내까정 태워다 줘야지.”

노인의 말에 남자가 연신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고맙습니다. 절대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말씀만 하시면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거 다 해드리겠습니다. 약속드립니다. 예!”

노인은 남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대꾸했다.

“요기 요거 보이지? 요 표딱지. 그려 그 장애인 뭐시기. 내가 다리가 불편해. 그래서 혹시 나쁜 놈인가 싶어 해코지 당할까봐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한 것인게 서운하다 생각 말고. 어여 옆에 타!”

남자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조수석 의자는 흙이 묻어 지저분했다. 바닥에는 삽이며 호미, 낫 같은 농기구도 뒹굴고 있었다. 무엇보다 꾸리꾸리한 냄새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발치에 놓인 검은 비닐봉지가 진원지인 것 같았다.

“농사짓는 차가 다 그렇지 뭐. 냄시가 독하면 창문을 쪼까 열어…. 그리고 말여 분명히 말하는디 내가 절대 보상 그런 거 바라고 이러는 거 아녀. 절대 아녀. 암. 그렇지.”

노인이 헛기침을 하며 차를 천천히 출발시켰다. 조수석에 등을 기대자 드디어 탈출한다는 생각에 안도감과 피곤함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노인이 한 손으로 작은 병을 하나 건넸다. 피로회복제였다. 목이 말랐던 남자는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뚜껑을 따 단숨에 마셔버렸다.

“에이 숭악한 넘들. 사람을 이런 데다 버리고 가…. 난 산 너머 동생네 다녀오는 길이네. 잘 안 가는데 오늘 기양 가고 잡더라고. 그쪽 만날라고 그랬는 모양이네. 근디 요즘은 죄다 전기트럭이라던데…. 고거… 을매나 비싼가?”

남자의 조급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이 느긋하게 차를 몰며 남자에게 물었다.

“다른 차에 비하면…. 하암…. 좀 비싸죠. 필요하시면 제가… 하암… 해드릴게요….”

건성건성 대답하는 남자는 트럭의 속도가 너무 느려 불만스러웠다. 가로등 없는 밤길, 장애로 다리가 불편한 노인이니 그럴만하다고 생각해 보지만 못마땅 한 마음은 영 풀리지 않았다. 불안하고 조급했지만 천천히 흔들리는 차의 진동 때문인지 긴장이 풀린 탓인지 남자의 눈에 졸음이 주렁주렁 매달리고 있었다. 간신히 눈을 비비며 앞을 보니 여러 개의 불빛이 길 끝에 나타나고 있었다. 틀림없는 가로등과 상가의 불빛일 것이다. 드디어 살았구나! 남자가 안도할수록 졸음의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 노인은 더 이상 말없이 불빛을 향해 차를 몰아가고 있었다. 천천히.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까무룩한 순간을 뚫고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왔네. 여기야.”

남자가 천근만근 무거워진 눈꺼풀을 필사적으로 밀어 올리며 차 창 밖을 살폈다. 가로등과 조명이 밝게 켜진 마을 한가운데 차가 멈춰 서 있었다. 길거리에 늘어선 건물 유리창에도 불빛들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길을 오가는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남자가 옆 자리 노인을 쳐다봤다. 가물거리는 시야 너머로 노인이 웃고 있었다.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언제, 어디서 봤더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자는 정신을 잃었다. 다시 깨어난 남자는 가늠할 수 없는 절망의 무저갱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도망쳤던 그 방에 다시 돌아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절망스럽게 죽여주세요.’라고 했지. 의뢰자가 내 눈을 보고 직접. 바로 그 의자에 앉아서. 자기 동생이 당신한테 그렇게 죽었다면서.”

정신을 차린 남자가 온몸을 뒤틀며 발버둥을 쳤다. 절망과 분노로 욕을 한바탕 쏟아내고 싶었지만 재갈을 문 입에서는 ‘흡, 흡’하는 신음소리만 날 뿐이었다. 원담이 테이블로 다가가 고장 나서 찍을 수 없다던 수동 필름 카메라를 다시 챙겨 들었다. 그리고 다가와 남자의 얼굴을 향해 렌즈를 들이대더니 여러 번 셔터를 눌렀다. 그때마다 ‘찰칵’ 하는 경쾌한 셔터음이 터져 나왔다. 원담의 필름 컬렉션에 또 하나의 진짜 살인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은 언제일까?”

카메라를 내려놓은 원담이 이번에는 칼을 집어 들고 남자 쪽으로 다가왔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순간?”

원담의 왼손이 재갈을 문 남자의 턱을 잡고 천천히 추켜올렸다. 남자의 눈동자가 좌우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반대지. 희망이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도망치고 있다고 믿는 바로 그 순간. 그 순간이 오히려 절망을 더 크게 만들지. 극대화시키지. 절망은 혼자 다니지 않아. 늘 희망과 함께 다니지. 그래야 더 절망스러울 수 있으니까.”

오른손에 들려 있던 원담의 칼이 단번에 남자의 목을 가로로 그었다. 피가 울컥 쏟아지며 원담의 손을 물들였다. 벌어진 목 틈으로 쌕쌕거리는 남자의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원담이 남자를 향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어때? 충분히 절망스러운가?”

원담은 남자의 눈빛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얼굴을 바싹 밀착해 들여다보고 있었다. 백 한 번째 진짜 살인의 완성이었다.




* 특별히 한 줄 요약 해드림
: 수동 필름 카메라가 고장 났다고

살인 의뢰받은 남자를 풀어준 킬러.

도망길에 만난 노인은

꼬장꼬장 따지기만 하고,

어렵게 도착한 마을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안도하다 훅 가버린 남자의,

목 벌어지는 이야기.

* '오늘비'의 뱀발 한뼘
: 이 이야기를 다 썼을 때

재난 안내 문자로

호우주의보가 내렸었지....


'구름 색깔은 까매
깊은 바닷속에 diamond
용감하게 또 slidin'
파도 위를 난 climb back
하늘에서는 호우주의보, 호우주의
준비됐어 난 호우주의보, 호우주의'
(호우주의 (Prod. by 코드 쿤스트) 가사 중 일부


(제목 이미지는 '뤼튼 AI이미지'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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