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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비 Sep 11. 2024

‘표준 8판 E-LESS 테스트’

회색 양복을 입은 사내가 건조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모니터와 노트북에서 눈도 떼지 않았다. 벌써 한 시간 째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휠체어에 앉은 원담도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담의 목소리 톤과 속도도 한 시간 내내 변함이 없었다.

“표준 절차.”

VIP병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노트북 화면 속에 보이는 뇌 사진 여기저기서 붉은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사내가 쥐고 있던 마우스 버튼을 딸칵 눌렀다.  

“의식이 돌아오기 전에 본 것은?”
“눈꺼풀.”

마우스 버튼이 또 한 번 딸칵 소리를 냈다.

“노트에 글을 쓴다는 건?”
“진화.”

또 한 번 딸칵.

“한 시간 전과 달라진 것은?”
“절차의 진도율.”

화면에 고정되어 있던 사내의 시선이 원담의 얼굴 쪽으로 옮겨졌다. 사내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한 시간 후 ‘표준 8판 E-LESS 테스트’ 절차 재개하겠습니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원담의 머리에 씌워져 있던 헬멧을 벗겨 탁자 위에 내려놓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태연한 표정과 달리 원담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감정 중독으로 엉망이 된 세상을 수습한 감정 히어로.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을 대신해 자연선택된 신인류인 ‘무감정 인류’의 이인자이자 ‘감정 정화군’의 사령관. 그런 위치에 있는 자신이 비참하게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다니.
어디로 가야 할까? 격리구역? 흔적도 없이 숨기에 적당하다. 하지만 격리구역 사람들에게 원담은 감정 정화를 이유로 가족과 친구들을 죽인 살인자다. 그들에게 들키는 순간 끝장이다. 오염구역? 예전에는 가능했지만 이제는 안된다. 발을 딛는 순간 발작으로 죽는다. 남은 건 미확인 지역. 격리구역을 탈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가 있다고 들었다. 그들을 찾아낸다면 살 수도 있다. 하지만 강원도 산골에 숨어 있다는 소문 말고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그 먼 길에서 무엇을 어떻게 만날지 알 수 없다. 원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디로 도망치든 ‘E-LESS 테스트’를 통과하는 것이 먼저다.
고위층을 대상으로 한 감정인 판별과 색출을 위해 사용하는 ‘E-LESS 테스트’를 개발할 때 원담도 참여했다. 권력의 이인자, 사령관이라는 감투 때문이기도 했지만 감정을 이해하는 후천적 무감정인이라는 특별한 이력이 더 크게 작용했다. 첫 번째 절차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것도 테스트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덕분이다. 이렇게 두 번만 더 고비를 넘기면 된다. 그러면 감정 정화군 사령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이곳을 탈출할 수 있다.
원담은 휠체어를 움직여 제 자리로 돌아왔다. 천천히 숨을 고르고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했다. 병실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회색 양복을 입은 사내가 다시 성큼성큼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두 번째 절차의 시작이다. 원담은 호흡과 마음을 가라앉히고 무표정하게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사내가 익숙한 손길로 소형 캠을 설치하고 노트북 화면을 보며 연결 상태를 확인했다. 이번에는 카메라를 통해 원담의 시선과 표정 반응을 집중적으로 관찰할 것이다.

“‘표준 8판 E-LESS 테스트’ 두 번째 절차 시작합니다.”

딸칵. 마우스 버튼 클릭하는 소리가 원담의 귀속으로 파고들었다. 회색 양복을 입은 사내가 노트북에 띄워진 카메라 창을 들여다봤다. 화면 안에는 원담의 눈이 확대되어 비치고 있었다. 회색 양복을 입은 사내는 검증 대상 맞춤형으로 추출된 단어들을 들려주고 대답하는 순간 눈동자의 움직임을 관찰할 것이다.

“노트, 지하철, 저녁.”

단어를 들은 원담의 시선이 왼쪽 위로 쏠렸다.

“퇴근길.”

사내가 쥐고 있던 마우스 버튼을 딸칵 눌렀다.

“괴물, 회의실, 검은 양복.”

이번에도 원담의 시선이 왼쪽 위로 쏠렸다.

“서점.”

마우스가 또 한 번 딸칵 소리를 냈다.

“구조대, 전화, 병원.”

원담의 눈은 여전히 왼쪽 위로 쏠려 있었다.

“사고.”

대답을 마친 원담의 눈동자가 이번에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담의 텅 빈 것 같은 검은 눈동자 속으로 회색 양복을 입은 사내가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무심한 사내가 또 한 번 마우스 버튼을 눌렀다. 딸칵. 딸칵. 딸칵. 마우스 버튼 클릭하는 소리를 따라 원담의 머릿속에 항상 무덥고 우울했던 사무실의 풍경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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