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은 오늘도 불만 메일을 여닫는 마우스 클릭 소리로 가득 찼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사무실 안에 들어서면 원담은 항상 진땀을 흘렸다. 오늘은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에 김 과장이 볼펜 꼭지를 반복해서 눌러대는 소리까지 뒤섞였다. 김 과장이 내는 딸칵 소리가 날카로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덥수룩한 머리, 유행이 지난 양복, 껑충하게 짧은 넥타이, 볼품없이 마른 체형의 원담이 김 과장 책상 옆에 주눅 들어서 있었다. 아무것도 못 느끼고, 아무 생각도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원담의 어처구니없는 바람을 비웃듯 가슴을 찌르는 딸칵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아, 씨발… 이러면 어쩌라는 거야?”
딸칵 소리가 멈추자 목이 자라처럼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김 과장은 문서를 넘겨보며 고개도 들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야, 야! 일 하기 싫어?”
마지막 어미를 길게 늘이며 올려붙이는 김 과장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신경을 긁었다. 김 과장은 보고 있던 서류를 탁 하고 책상에 내던지듯 내려놨다. 그리고 원담을 안경 너머로 삐딱하게 노려봤다.
“일 하기 싫으면 관둬. 여기 오고 싶은 사람 널렸어!”
김 과장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에 꼬아 올렸다. 아무 일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원담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렸다.
“나이는 서른이나 처먹고 일도 못해, 성격도 그지 같아, 열정도 의욕도 센스도 없고 …. 씨발 그 너저분한 옷하고 머리 꼬락서니는 어떻게 좀 안 되냐. 말주변도 없는 게 융통성도 없고. 꼴에 자존심만 높지 …. 아, 그래. 참는 거, 잘하지 참는 거. 씨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
자리에서 일어선 김 과장이 책상에 있던 문서를 원담의 가슴팍에 거칠게 내던졌다. 그리고 원담뿐만 아니라 사무실의 모든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질질 끌다가 지쳐 나가떨어지게 만들라고 몇 번 말했어? 너 때문에 그 진상 새끼한테 왕창 물어주게 됐으니까, 그 돈은 네가 책임져! 꺼져, 가서 노트나 써!”
아무 일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주문을 외우며 버티고 서 있던 원담은 사방으로 흩어진 보고서를 주섬주섬 모아들었다. 자리로 돌아온 원담은 책상 서랍에서 검정색 노트를 꺼냈다. 그 순간 까지도 원담의 주문은 계속 됐다. 아무 일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노트를 펼친 원담은 볼펜을 들어 급히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씨발 새끼 죽여버릴 거야. 지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지랄이야 지랄이. 서비스가 개 같은데 CS만 잘하면 뭐 하냐고 씨발. 보상해줬으면 됐지 뭘 더 처먹겠다고 계속 전화하고 지랄이야 지랄이. 개새끼 너도 뒈져버려 씨발. 그냥 전부 다 대갈통을 날려버렸으면 좋겠다. 씨발 지긋지긋해!’
탁 소리 나게 볼펜을 내려놨다. 엿 같은 기분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회사에서 노트를 나눠준 건 한 달 전이었다. 개발 중인 제품으로 정식 출시 전에 성능을 시험해 보고 싶다며 투자자 중 한 사람이 대표에게 부탁을 했다. 부탁한 사람의 영향력을 보여주듯 대표가 직접 나서 노트를 나눠줬다. 검은색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광 겉표지. 표지 우측 상단에 작게 엠보싱 처리된 대문자 E. 실 제본된 줄 없는 미색 내지가 스무 장. B5 크기. 투명 PVC 케이스에 개별 포장된 노트는 시제품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고급스러웠다. 가장 놀라운 건 노트의 기능이었다. 화가 나거나 기분이 나쁠 때 노트에 적기만 하면 그 감정을 즉시 없애준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감정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트에 바른 특수한 용액에 흡수되는 것이었다. 감정도 뇌에서 일어나는 호르몬의 작용과 관계가 있으니 그걸 통제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고객의 클레임과 관리자들의 막말에 시달리던 직원들에게 노트는 구세주의 선물과 같았다. 고객 접점 직원들의 스트레스가 줄어드니 만족도와 업무 처리 효율이 눈에 띄게 개선됐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대표는 신바람이 났다. 효과를 마구 부풀려 테스트용 공짜 시제품을 더 많이 지원받았다. 관리자들도 신바람이 났다. 아무리 심한 말을 직원들에게 퍼부어도 노트에 한번 끄적이게 하면 만사 오케이였기 때문이다. 공짜 노트가 대표부터 직원들까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노트에 회사와 상사, 동료들에 대한 욕과 불만이 한가득 적혀 있는 것을 본 대표가 회사 밖으로 골치 아픈 일들이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노트를 철저히 관리하라고 지시했다. 지급된 노트는 퇴근할 때 관리자에게 반납하고, 출근해서 다시 받아가도록 했다. 다 쓴 노트는 총무팀에서 반납받아 비품 창고에 보관했다. 불과 일주일 만에 노트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시제품이 배포된 지 한 달 후 ‘감정노트’가 정식 출시 됐다. 출시와 함께 온 세상이 감정노트에 대한 이야기로 도배 됐다. 국내외의 잘 나가는 인플루언서들이 감정노트를 두고 침이 마르게 칭찬을 늘어놨다. 감정관리 때문에 낭비되던 에너지를 더 창의적인 일에, 더 즐거운 일에 쓸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인류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더 높여줄 신의 선물이라고.
핵심 원료인 감정 제거 엑기스 생산이 까다롭고 어려워 노트의 가격도 비쌌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효능을 경험한 사람들은 기꺼이 수십만 원의 가격을 지불했다. 감정노트는 구질구질한 감정에서 벗어난 극한의 자유롭고 쿨한 상태를 상징하는 가장 핫한 문화적 아이콘이 됐다.
공짜로 나눠준 마지막 감정노트를 회사에 반납한 원담은 퇴근과 함께 강남 한복판에 자리 잡은 감정노트 매장으로 달려갔다. 한 달치 월급 대부분을 쏟아부어 여러 권의 감정노트를 샀다. 매장 안에는 여러 명의 같은 사무실 직원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은 계산대 앞에서 서로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다가 계산을 마치자마자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매장 문을 열고 나갔다.
직원들이 개인 돈으로 감정노트를 사서 쓰기 시작하자 회사도 더 이상 관리하지 않았다. 감정노트는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사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거기에 아무리 심한 내용이 적혀 있어도 법적으로 문제 삼을 수 없고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법원의 해석이 회사에게 면책권을 부여했다.
감정노트가 보여준 감정 없는 홀가분한 삶은 훌륭했다. 돈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 일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주문을 현실로 만들어준 감정노트가 있어 원담은 정말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