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퇴근 시간의 복잡한 거리에 갇혔다. 원담의 머릿속에는 서연이 말한 ‘해야 하는 일’이라는 말이 맴돌고 있었다. 검정 양복을 입은 남자가 차를 길가에 세웠다. 차에서 내린 원담은 화려한 조명이 넘쳐나는 시내 한복판을 걸었다. 퇴근길의 시내 중심가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예전에는 자신만만하고 멋진 사람들로 가득해서 원담을 부끄럽고 초라하게 만들었던 거리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무 의미도 감흥도 없는 사람들이 떼로 몰려다니는 복잡한 길일뿐이다. 세상은 그대로지만 원담이 달라지니 모든 것이 달라져 보였다. 백 미터쯤 앞에 좀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드나들던 대형 서점의 간판이 보였다. 원담은 자석에 이끌리듯 서점 안으로 들어섰다. 서점의 시그니쳐 향이 코 끝에 확 끼쳐왔다. 원담은 넓은 중앙 복도를 따라 서점 안을 서성거렸다. 그때였다.
“으악, 이 사람 왜 이래? 아저씨 정신 차려요, 여기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경찰, 아니 119 불러요! 119! 악! 저리 가! 왜 이래?”
서점 한쪽에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뭔가에 놀란 사람들이 서가 사이에서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왔다. 그 뒤를 따라 괴물 소리를 내는 한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서점 안을 둘러보더니 가장 사람들이 많은 쪽을 향해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원담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유출된 감정에 중독된 사람이었다. 순식간에 서점 안이 아수라장이 됐다. 사람들은 출입구를 향해 앞다퉈 서로를 밀치며 뛰었다. 회전 출입구 앞에는 한꺼번에 몰린 사람들이 뒤엉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진열되어 있던 책들이 달아나는 사람들에 휩쓸려 바닥에 나뒹굴었다. 몇몇 직원들이 괴물이 되어 날뛰는 사람을 잡기 위해 용감하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원담은 서점 한가운데 서서 모든 광경을 무심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고양이에 놀라 달아나는 쥐떼가 꼭 저런 모습일 거야.’
원담의 발에 책 한 권이 밟혔다. 집어 들어 표지를 살폈다. <종의 기원>.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쪽도 읽어 본 적 없지만 저자와 내용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책. 원담은 이리저리 책장을 넘겼다. 구겨진 페이지를 넘기니 ‘자연선택’을 설명하는 챕터가 펼쳐졌다. 도태되는 것들은 결국 도태될 수밖에 없다.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종만 결국 살아남는다. 배려도 자비도, 누군가의 의도도 감정도 원한도 없는 냉정한 자연의 질서. 원담의 눈에는 살기 위해 악을 쓰며 도망치는 사람들이 도태의 운명을 피해 달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저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쳐도 결국 자연의 선택에 따라 멸종될 수밖에 없지.’
원담은 고개를 들어 서점 천장을 올려다봤다. 거울처럼 매끈한 천장에는 원담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감정에 중독되지도 않고 중독된 자들에게 쫓기지도 않는 고요한 무감정의 남자가 거기 서 있었다. 원담은 살려달라고 울고 불고 소리 지르는 사람들을 밀치고 서점 밖으로 나왔다. 원담의 손에는 <종의 기원>이 들려있었다. 서점 출입구 근처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스마트폰 카메라를 켜고 촬영하며 수군대고 있었다.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와 경찰들이 부는 호각 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원담은 그 길로 다시 서연을 찾아갔다. 그리고 서연 앞에 <종의 기원>을 펼쳐놨다.
“자연선택. 대자연이 무감정을 선택한 거예요. 무감정이 아닌 사람들은 감정에 중독돼서 모두 죽어버리니까. 죽지 않는 우리는 선택받은 새로운 종인 거죠. 새로운 종이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이유도 이해도 필요 없는 거죠. 박사님 말씀처럼 말 그대로 해야 할 일이니까.”
원담이 들고 온 책을 살펴보던 서연이 물었다.
“고전에서 답을 찾았군. 우린 뭘 해야 하는 걸까?”
“이 세상을 혼란에 빠뜨린 감정 그리고 감정에 휘둘린 열등한 종들을 도태시켜야죠. 그게 자연의 선택이고, 우리 같은 무감정의 신인류가 살아갈 세상이니까요.”
“도태라…. 신인류가 할 만한 일이군.”
원담을 바라보고 있던 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원담은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거칠고 마른 서연의 손은 차가웠다. 그것이 벌써 7년 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