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P병실 안은 쾌적했다. 그 쾌적함이 원담의 목을 더욱 마르게 했다. 몇 걸음만 걸으면 병실 안에 설치된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물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사소한 욕구 표현도 ‘E-LESS 테스트’의 중요한 분석 대상이기 때문이다. 원담은 티 나지 않게 마른침을 삼켰다. 회색 양복을 입은 사내의 시선은 노트북에 띄워진 원담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미세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최고 지도자를 만난다면?”
“상세한 업무 보고를 하겠다.”
회색 양복을 입은 사내가 손에 쥔 마우스를 딸칵 눌렀다.
“왜 그렇게 말한 겁니까?”
“사령관의 책임과 의무다.”
마우스가 또 한 번 딸칵 소리를 냈다.
“가장 최근에 만난 사람은 누굽니까?”
“자네.”
“그 사람과 어떤 대화를 나눴습니까?”
“‘표준 8판 E-LESS 테스트’ 두 번째 절차.”
“당신이 믿는 것은?”
“감정 정화법. 그리고 자연선택.”
회색 양복을 입은 사내의 오른손 검지 손가락이 방아쇠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마우스의 딸칵하는 소리가 총성처럼 병실을 가득 채웠다. 원담의 머릿속에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그날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격리 구역 광장에는 감정 정화군에게 끌려 나온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의 궁금증과 불안함을 뚫고 총성이 울렸다.
‘탕!’
원담의 손에 들려 있던 권총이 불을 뿜었다. 감정 정화군에게 체포되어 길거리에 꿇어앉아 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포의 신음을 입 속으로 삼켰다.
“이 감정인은 죽을 뻔한 아이의 목숨을 구해 동정심과 숭고함을 불러일으켰다. 불순한 행위였다. 감정 정화법이 정한 재고의 여지가 없는 심각한 범죄다. 때문에 즉결 처분형에 처했다.”
살아남은 한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여전히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원담은 권총을 그대로 든 채로 남은 사내의 곁으로 다가섰다. 원담이 움직일 때마다 중무장한 감정 정화군 1개 소대 병력이 그를 따라 움직이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 감정인은 감정 유발자와 감정 유발 물품을 고발했다. 감정 정화법을 충실히 따랐지. 하지만 이 감정인에 대한 내 판결도 역시 즉결 처분이다.”
원담의 권총이 또 한 번 불을 뿜었다. 조금 전까지 살아 숨 쉬고 있던 사내가 피투성이가 되어 헝겊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다른 감정인들을 협박하고 괴롭혀서 전염성이 높은 공포심과 두려움을 유발하던 자였다. 준법 행위자라도 상습적인 부정적 감정 유발자라면 가차 없이 처벌하는 것이 감정 정화법의 정신이다. 잊지 말도록.”
말을 마친 원담이 몸을 돌려 광장 입구에 세워둔 차량 쪽으로 걸어갔다. 광장 한복판에는 건물 지하에 숨겨져 있던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제법 많은 책과 그림, 음반이었다. 정화군 한 사람이 물건에 불을 붙였다. 불길이 하늘 높이 타올랐다.
서연과 원담은 감정 유출 사태를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차근차근 자신들의 힘을 키워나갔다. 감정 유출로 엉망이 된 현장에서 원담은 종횡무진 활약했다. 유출된 감정 노트들을 제거하고, 중독되어 괴물로 변한 사람들을 격리했다. 현장을 수습하고 나면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고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에 대해 꼼꼼하게 설명했다.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은 많았다. 모든 곳을 다니면서도 원담은 짜증을 내거나 귀찮아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자랑하거나 잘난 척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한결같은 원담을 보고 ‘감정 히어로’라고 부르며 열광했다. 나날이 높아가는 인기와 영향력을 이용해 서연과 원담은 차근차근 무감정 인류의 세상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다. 유능한 무감정인을 비밀리에 조직화해 정부 기관에 침투시켜 핵심 기능을 장악했다. 한편으로 감정 유출과 중독을 무기로 정치인과 기업가들을 협박하고 회유해 자신들에게 필요한 법적 제도적 장치들을 착착 만들어 나갔다. 불과 3년 만에 정부는 허울 좋은 껍데기만 남았고 실질적인 권력은 서연과 원담 그리고 조직화된 무감정인들에게 장악됐다.
서연과 원담이 권력을 잡고 가장 먼저 시행한 것이 신분 정책이었다. 감정 유출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무감정 인류’, ‘감정 인류’, ‘감정 오염자’와 같은 신분 등급 체계를 만들어 각각의 거주 및 권리와 자격을 제한했다. 신분 등급 체계가 완전히 자리 잡힌 2년 후에는 ‘감정 정화법’을 제정해 감정과 관련된 모든 행위를 무감정 인류 체제를 위협하는 심각한 범죄로 규정하고 단속, 처벌했다. 오늘의 수색도 그 법에 따라 집행된 것이었다. 무감정 인류는 감정을 유발할 수 있는 그 어떤 물건도, 인물도, 언행도 용납하지 않았다. 물건들은 발견 즉시 태워졌고, 사람들은 체포되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예전이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일상적인 문화와 행동들이 금지되었다. 이 일을 주도한 조직이 ‘감정 정화군’이었고, 감정 정화군의 수장인 사령관이 바로 원담이었다. 감정 정화군은 자연도태 대상인 감정을 말살해 신인류의 세상을 지키는 순결한 수호자였다. 동시에 무감정 인류의 최고 지도자인 서연과 이인자인 원담의 명령을 집행하는 최정예 친위대였다. 하지만 격리구역에 갇힌 감정인에게는 한 때는 히어로였지만 지금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살인마로 변해버린 악마, 원담의 꼭두각시들일뿐이었다. 감정 유발 물품을 휘감은 불길이 바람을 타고 거세게 타올랐다.
“제 152 격리 구역으로 가실 차롑니다.”
부사령관이 다음 행선지를 원담에게 알렸다. 원담은 스마트폰을 꺼내 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권력을 장악하고 난 이후에도 원담은 감정 정화 작업의 세세한 사항까지 항상 서연에게 보고했다.
무감정 인류가 권력을 잡은 이후 서울은 기존 행정동 체계에 따라 426개의 구역으로 구분됐다. 그중 무감정 인류의 본부가 있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50개 지역은 허가받은 무감정인들만 출입할 수 있는 ‘정화구역’으로 지정됐다. 감정 유출이 심각한 35개 지역은 ‘오염구역’으로 지정하고 폐쇄해 감정인들의 출입을 막았다. 감정 중독 위험이 없는 57개 지역은 ‘안전구역’으로 지정해 감정인들 중 이용 가치가 높은 협력자들을 이주시켰다. 나머지 284개 지역은 ‘격리구역’으로 지정해 일반 감정인들이 거주하게 했다. 격리구역의 감정인들은 의무적으로 매일 감정노트를 작성해 감정을 제거해야 했다. 언제 터질지 모를 감정 중독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원담이 시작한 조치였다. 이 조치에 반발해 격리구역 이주를 거부하고 서울 밖으로 탈출한 감정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감정 정화군이 접근할 수 없는 깊은 산골로 숨어들었다. 사람들은 이 지역을 ‘미확인 지역’이라고 불렀다. 그곳에서는 감정인들이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찾아 떠난 사람은 있어도 보고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소문만 무성했다.
다음 행선지인 152 격리 구역에서는 감정인들이 여럿 모여 은밀하게 집회를 하다가 적발됐다. 최근 빈번히 적발되는 명상 모임인 것 같았다. 여러 번의 신호음이 지나고 나서 전화가 연결됐다.
“응.”
서연의 반응은 항상 짧고 건조했다.
“37 구역 감정 유발 물품 처리 끝났습니다.”
“뭐였지?”
“책, 그림, 음반들이었습니다. 다 태웠습니다. 그리고 감정 유발자 두 명 즉결 처분했습니다.”
“말들이 많아. 즉결 처분은 지나치다고. 다음은?”
“모자란 것보다 지나친 게 낫습니다. 152구역입니다.”
“거긴?”
“명상 모임입니다. 요즘 늘고 있는. 감정 정화법에 따라 즉결 처분 할 계획입니다.”
“지나친 게 항상 나은 건 아니야. 왜곡시키거든. 그러면 치우는 수밖에 없어.”
“왜곡이 아니라 선택된 운명입니다. 모든 것을 걸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그렇게 말하니… 할 수 없군.”
전화가 끊겼다. 원담은 끊어진 전화 화면을 잠시 들여다봤다. 요즘 들어 서연이 ‘지나치다’고 말하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원담은 무감정 인류에 협력하는 감정인들이 자신이의 잔인함에 대해 서연에게 하소연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서연의 지나치다, 왜곡이다라는 표현도 아마 그 때문에 나왔을 것이다. 감정인들은 자신들의 열등함을 이런 식으로 드러낸다. 도태의 과정에 있는 종의 마지막 투정일 뿐이라고 원담은 생각했다.
“현장 정리하고 바로 출발한다.”
원담의 지시에 정화군 1개 분대가 처형된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3개 분대는 사령관인 원담을 호위해 다음 지역으로 이동할 준비를 했다. 원담이 문을 열고 차에 오르려던 순간 광장을 가로질러 둥그런 무엇인가가 데굴데굴 굴러왔다. 정화군 병사가 발로 멈춰 세웠다. 들어 올리는 순간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사방이 먼지로 뒤덮였다. 원담의 몸이 번쩍 날아올라 허공을 가로질렀다. 사람들의 비명과 정화군 병사들의 목소리가 뒤섞였다. 아직 도태시킬 것이 많이 남았는데. 신인류의 세상이 완성되지 않았는데. 원담이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던 의식의 밧줄이 툭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