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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비 Oct 02. 2024

운명의 심술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검은 장막이 걷히더니 빛이 눈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원담의 귀에 규칙적인 신호음이 들렸다. 누군가가 바삐 이것저것 만지기 시작했다. 병실 문을 열고 주치의와 함께 여러 사람이 들어왔다.

“사령관, 정신이 듭니까?”

‘병원이구나. 죽지 않았어. 살았어. 아직 도태시켜야 할 것이 많이 남았는데. 이렇게 갈 수는 없지. 다행이야, 정말 다행…!’

원담은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라는 말을 떠올린 게 언제였던가.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규칙적이던 신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당황한 원담이 필사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신호음의 속도도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다시 차분해진 신호음을 내는 기계들을 들여다보던 주치의가 말했다.

“정화군 병사가 정면에서 폭발을 막아준 덕분에 다행히 큰 부상을 입지 않았습니다. 며칠 더 쉬면 퇴원해도 될 것 같습니다. 깨어났다고 최고 지도자께 보고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주치의와 의사들이 병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원담이 깨어나는 걸 지켜보고 있었던 간호사가 주치의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주치의가 원담을 힐끗 쳐다봤다. 주치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간호사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거린 뒤 병실 밖으로 나갔다. 간호사도 뒤를 따랐다. 병실에 홀로 남은 원담은 제 몸에 붙어 있던 줄들을 뜯어냈다. 규칙적인 신호음들이 높고 긴 소리로 바뀌었다. 당황한 간호사들이 달려왔다가 상황을 보고 날카로운 신호음을 내는 기계들의 스위치를 꺼버렸다. 원담은 절망스러웠다. 다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김 과장에게 무시당하던 그 시절의 어리숙한 원담으로 돌아가버린 것 같았다. 사령관이라는 자리도, 무감정 신인류의 히어로라는 명성도 모두 이대로 끝이었다. 격리 구역의 어딘가에 갇혀 비참하게 조롱당하며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이 시나리오는 격리 구역의 감정인들이 원담을 곱게 놓아두었을 때의 이야기다. 아마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그들은 원담의 목에 밧줄을 걸고 차에 매달아 길거리를 달릴 것이다. 감정 정화라는 명분으로 가혹하게 사람들을 대했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몇 년 만에 맛보는 감정은 아찔할 만큼 맵고 어지러운 것이었다. 이대로 주저앉아 있다가는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체포될 것이다.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했다. 간신히 냉정을 회복한 원담이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 머릿속으로 검토했다. 절차는 불 보듯 뻔했다. 변절자와 배신자를 색출해 내기 위한 검증 절차를 만들고 운영한 것도 원담이었으니까. 병실의 전화가 울렸다. 원담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전화를 받았다. 서연이었다.

“깨어났다고? 지나치면 왜곡되고 결국 치울 수밖에 없다고 내가 그랬지? 그것도 도태되어야 할 대상이야.”

서연은 원담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한 통의 전화로 원담의 걱정이 현실이 됐다. 계단에서 굴러 무감정인이 되기 전에 늘 쩔어 살았던 불안과 공포. 다시는 느낄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너저분한 감정의 갑작스러운 반격에 당황스러웠다. 여러 번의 심호흡 끝에 다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최고 지도자가 전화를 한 건 아마도 마지막 확인이었을 것이다. 주치의와 간호사들의 보고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내일 아침 그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감정 정화군 중에서도 충성심이 강하고 어떤 순간에도 동요하지 않는 선천적 무감정인 최정예만을 따로 모아 만든 조직. 고위층에 대한 심문을 전담한 ‘E-LESS 테스트’ 요원들. 이들이 온다는 건 사실상 이제까지의 모든 신뢰가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테스트를 받았던 대부분의 고위직들도 테스트가 종료됨과 체포되어 모든 지위를 잃고 구금되거나 즉결 처분됐다.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해도 최고 지도자의 의지에 따라 처분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다. 최고 지도자에게 최종 결정을 제안하는 것이 바로 원담의 역할이었고 권력이었다. 원담은 개발 과정에 참여했던 기억을 최대한 되살려 테스트의 절차와 질문 구조, 의도, 해석 방법 따위를 하나하나 떠올리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리고 미세한 몸짓부터 말투, 눈동자의 위치와 움직임까지도 세밀하게 검토해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병실 창문 밖으로 부옇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했다. 긴장과 처절한 훈련의 밤이 지나 운명의 아침이 밝았다. 병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바싹 메마른 목소리. 그들이었다.

“들어와.”

회색 양복을 입은 남자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병실로 들어왔다. 그 뒤로 관찰 장비와 노트북이 놓인 테이블이 따라 들어왔다. 먼저 들어온 두 남자가 장비를 설치할 자리를 지정하자 일사불란하게 작업이 진행됐다. 원담은 건조하고 관심 없는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두 남자 중 한 명이 병실 밖으로 나갔다. 남아 있던 남자가 원담 쪽으로 다가왔다.

“‘표준 8판 E-LESS 테스트’ 시작하겠습니다.”

마침내 테스트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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