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P병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E-LESS 테스트’의 두 번째 절차가 끝났다. 회색 양복을 입은 사내가 노트북에 장착한 카메라를 끄고 휠체어에 앉은 원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방향으로 의자를 돌려 앉았다. 그의 시선이 원담의 가슴 근처에 꽂혔다. 마지막 세 번째 절차는 말과 말 사이에 드러나는 숨겨진 감정 표현과 제어하지 못하는 신체 반응을 살피는 단계였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한다면?”
“규정과 절차에 따른 업무 수행 중.”
회색 양복을 입은 사내의 손에 들려 있던 마우스가 딸칵 소리를 냈다.
“37구역에서 즉결 처분된 사람이 이 광경을 본다면?”
“이미 죽은 사람이라 볼 수 없다.”
마우스가 딸칵 소리를 냈다.
“도태가 완료된다면?”
“다음 임무를 기다린다.”
딸칵.
“두 번째 인생이 주어진다면?”
“자연선택에 따른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또 딸칵.
“5년 전의 자신을 만난다면?”
“즉시 감정 정화법에 따라 도태시킨다.”
딸칵. 원담의 온몸을 날카롭게 노려보던 회색 양복을 입은 사내가 노트북과 장비를 챙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서 기다리던 다른 사내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바꾸겠습니다’는 말과 함께 전화기가 병실에서 나온 사내에게 건네졌다.
“상태는?”
“테스트를 통과했습니다.”
“상관없어. 지나치니까. 도태시켜.”
“여기는 눈들이 많습니다. 조용한 곳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마.”
통화를 마친 사내가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 혹시나 싶은 긴장감에 원담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사내가 무심하게 말했다.
“모든 절차 완료되었습니다. 이상 없는 것으로 최종 판단합니다. 명에 의해 사령관 직에 복권되었습니다. 최고 지도자께서 찾으십니다.”
회색 양복을 입은 사내가 고개 숙여 인사하고 병실을 나갔다. 병실 공기가 한층 가벼워졌다. 원담은 터져 나오려는 안도의 한숨을 간신히 참았다. 감정 정화군 병사가 들어와 원담에게 사령관 군복과 모자, 군화, 탄띠, 그리고 권총을 내밀었다. 원담은 천천히 복장을 갖추면서 지시했다.
“최고 지도자님 뵈러 간다. 차량 준비시켜. 직접 운전한다. 본부로 가는 동안 사령관 깃발을 단 차량 여러 대를 시내에 운행시켜. 진짜가 어디 있는지 모르게. 차들 검문하지 마. 경호대는 최종 목적지가 어딘지 모르게 시내를 돌다가 30분 후 최고 지도자 집무실로 집결해. 추가 테러가 있을 수 있다. 각별히 보안 유지해.”
군복과 무기를 가져왔던 병사가 경례를 하고 병실을 나갔다. 단추를 채우고 벨트를 매는 원담의 손이 떨렸다. 이런저런 사항들을 미리 지시해 놓은 덕분에 원담은 손쉽게 검문을 뚫고 서울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강원도 방향으로 차를 몰아 달리던 원담은 갈림길에서 차를 버렸다. 차량에 실려 있던 비상식량을 챙겨 강원도 방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노출되지 않도록 해가 진 뒤 산 길로만 걸었다. 최대한 마을이나 사람들과의 접촉도 피했다. 히어로로 추앙받던 원담의 얼굴은 누구든 쉽게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밤 길을 걸을 때면 여러 가지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누구보다 신뢰했던 최고 지도자의 수상한 말들 그리고 벌어진 폭탄 테러. 원담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다고!’
소용이 없었다. 한번 불붙은 의심은 순식간에 활활 타올랐다. 의심을 연료 삼아 배신감도 끓어올랐다.
원담이 목숨을 걸고 강원도로 도망치는 동안 서연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원담이 감정을 느끼게 됐고, 테스트를 속여 통과한 후 서울 밖으로 달아났다는 사내의 말을 들은 서연이 잠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다시 감정인이 됐다고? 역시 그때 광장에서 도태시켰어야 했어. 지나치거나 열등하거나 어느 쪽이든 문제거든.”
서연이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를 올려다봤다.
“이도 저도 아닌 교란종이 됐어. 교란종은 없애는 게 정답이야.”
말을 마친 서연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집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거지 꼴을 한 원담이 차가 한대 지나갈 만한 비포장 산길을 걷고 있었다. 길을 따라 ‘지뢰’라고 적힌 푯말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서울을 탈출할 때 가지고 온 비상식량은 바닥난 지 오래였다. 나무뿌리나 열매, 운이 좋으면 작은 동물을 잡아먹으며 버텼다. 원담은 자신이 민간인 통제 구역이나 GOP지역으로 들어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오는 동안 두세 번 감정 정화군 추격대에 쫓겼다. 멀리서 본 추격대의 차 안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타고 있었다. 서연 곁을 떠나 여기까지 온 것은 원담의 탈출을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증거였다. 원담이 아는 한 이 지역은 감정 정화군 추격대의 작전 범위가 아니다. 더 이상의 추격대가 없을 거라는 안도감도 잠시 뿐 지뢰와 감정에 중독된 군인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전략물자로 감정노트를 도입한 군대는 감정 유출 사고가 터지자 최전방 격오지 부대부터 포기했다. 이런 사정은 은밀하게 감정노트를 도입한 북쪽 군대도 다르지 않았다. 그 결과 군사적 긴장감이 팽팽했던 지역이 지뢰와 철책, 감정에 중독된 병사들만 남은 광활한 공터로 버려졌다. 원담은 며칠째 변변한 음식도 물도 마시지 못했다. 손에 쥔 무기가 그나마 위안이 됐다. 몇 개의 빈 초소를 지나니 제법 규모가 큰 주둔지가 나타났다. 원담은 조심스럽게 입구 위병소에 접근했다. 위병소는 비어 있었다. 위병소 위쪽에는 헬기 이착륙장이 있었다. 그 뒤로 위장막이 덮인 유류 창고가 보였고, 오르막길을 따라 여러 채의 막사들이 늘어서 있었다.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원담은 최대한 경계하며 막사 안을 뒤졌다. 사람은 물론 건빵 한 조각 남아 있지 않았다. 계속 앞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능선을 타고 철책이 펼쳐져 있었다. 능선 아래쪽에는 차가 다닐 수 있는 보급로가 이어져 있었다. 원담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황량하고 넓은 곳에 숨어 사는 사람들을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원담은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억울하고 서러운 마음에 목 놓아 울었다. 한참을 울고 나자 마음이 진정됐다.
‘신인류라고 거들먹거리며 도태라는 칼을 휘두르다가 하루아침에 쫓겨난 불쌍하고 한심한 인생. 도태되어 마땅한데도 살겠다고 여기까지 도망쳐 온 구질구질한 인간.’
바닥에 누워 자책하던 원담이 눈을 번쩍 뜨고 몸을 일으켰다. 바람 소리에 실려 인기척이 들렸다. 감정에 중독된 병사들인가 싶어 권총을 고쳐 잡고 사방을 둘러봤다. 길게 뻗은 보급로 모퉁이에서 사람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당황한 원담이 소리쳤다.
“거, 거기 누구야! 다가오지 마!”
낡은 군복을 입고, 모자를 눌러쓴 사람들이 멈춰 서서 일제히 원담을 향해 K2 소총을 겨눴다. 눈만 빼고 얼굴 전체를 천으로 감싸고 있어서 표정은 알아볼 수 없었다. 멈춰 서서 대치한다는 건 감정에 중독된 사람들은 아니라는 의미다. 원담은 권총을 단단히 틀어쥐고 그들을 마주 겨눴다. 한 남자가 총을 내리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왔다. 원담이 그를 향해 권총을 겨눴다. 남자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풀어내리고 양손을 어깨 높이까지 들어 올려 보였다. 50대 초반의 남자가 원담에게 물었다.
“혼자요?”
원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감정 정화군이요?”
원담은 그제야 자신이 탈출할 때 입고 있던 감정 정화군 군복을 그대로 입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도망치는 내내 사람들을 피하느라 마을을 피하다 보니 갈아입을 만한 옷을 구하지 못한 탓이다. 원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군복을 입고 있지?”
“탈출할 때 뺏어 입었습니다.”
“근데 어쩐지 낯이 익은 것 같은데….”
낯이 익다는 말에 원담은 긴장했다. 남자의 눈썰미가 매서웠다. 원담은 최대한 정체를 숨기자고 마음먹었다.
“여긴 왜 왔소?”
“미확인 지역을 찾아왔습니다.”
“아… 미확인 지역? 안전촌 말이군. 무감정인들이나 그렇게 부르지…. 거긴 왜?”
“거기서 살려고요. 혹시 어딘지 아십니까?”
“글쎄…. 서울에서 여기까지 혼자 온 거요?”
원담은 입이 말라 더 이상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원담의 눈에 남자의 허리춤에 매달린 물통이 보였다. 저도 모르게 물통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남자가 물통을 허리춤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원담쪽으로 던졌다. 원담은 권총을 내던지고 물통을 받아 뚜껑을 열어 허겁지겁 마셨다. 목마름이 해결되자 허기가 밀려왔다. 남자는 다 알고 있다는 듯 지고 있던 배낭에서 뭔가를 꺼내 원담쪽으로 던졌다. 물을 마시던 원담이 발치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 들었다. 넓은 나뭇잎으로 싼 고구마였다. 원담은 걸신들린 사람처럼 고구마를 먹어치웠다. 그리고 물통에 남은 물을 마셨다.
“많이 굶은 모양이군. 더 먹겠소?”
남자는 나뭇잎에 싼 고구마 두 개와 새 물통 하나를 원담 앞에 내려놨다. 원담은 탐욕스럽게 그것들을 낚아채 입 안으로 욱여넣었다. 다 먹고 나자 비로소 살 것 같았다.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다시 물었다.
“왜 도망쳤소?”
“부모님이 남겨주신 책 몇 권 가지고 있다가 감정 유발 물품 소지죄로 체포됐습니다. 즉결 처분으로 당하기 직전에 폭탄이 터져서 사령관이 다친 것 같더라고요. 완전히 아수라장이 됐어요. 그 틈에 도망쳤습니다. 정화군 한 놈이 따라오길래 죽이고 옷을 뺏어 입었습니다. 그러면 도망치기 쉬울 것 같아서요.”
“어디서 체포됐소?”
“37구역입니다.”
태연하게 말을 했지만 원담의 가슴은 심하게 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남자와 함께 온 일행들이 자신의 얼굴을 계속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 소문은 들었지. 사령관이 죽었다고 하던데. 아니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죽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도망치다 사령관이 어디로 간다 뭐 그런 무전 내용을 들었거든요.”
원담의 말을 들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뒤에 서 있던 다른 사람들 쪽으로 걸어가 목소리를 낮춰 뭔가 이야기를 나눴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간간히 원담 쪽을 돌아봤다. 한 사람이 팔을 휘둘러가며 화가 난 듯한 몸짓을 해 보이자 원담과 이야기를 나눴던 남자가 그의 팔을 토닥거렸다. 씩씩거리던 사람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남자가 그의 등을 쓸어주고는 원담 쪽으로 다가왔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오?”
원담이 대답하지 못한 채 뒤쪽에 선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당신이 누군가를 닮은 것 같아서 그러는 거요. 잡아다가 조사해 보자고. 내가 그러지 말자고 했소. 그 사람은 무감정인이니까 아닐 거라고. 당신은 감정인이라고 하지 않았소? 세상에 어쩌다 닮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시오.”
남자가 원담에게서 등을 돌리며 말했다.
“여긴 지뢰가 많으니 조심하시오.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으니 오가다 만나면 오해 없도록 잘 설명해야 할 거요. 그럼 조심히 가시오.”
원담은 떠나가는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대열의 맨 마지막 사람의 모습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순간 원담이 달리기 시작했다. 원담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남자와 일행들이 멈춰서 총구를 겨눴다. 숨이 목까지 차오른 원담이 그들 앞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저도, 저도 데려가주십시오.”
남자가 물끄러미 원담을 바라봤다.
“함께 가면 되돌릴 수 없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무조건 살려준다고 약속할 수도 없고. 그래도 괜찮겠소?”
원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일행이 원담의 권총을 빼앗고 눈을 가렸다. 원담은 피할 곳 없는 막다른 골목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