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걸었을까. 눈앞에 어두워지고 공기가 퀴퀴해지는 것을 보니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사람 목소리도 들렸다.
‘비무장지대 안에 건물이 있어?’
원담의 눈을 가렸던 천이 풀렸다. 원담은 침침한 조명이 달린 어둡고 좁은 창고 한가운데 서 있었다. 보급로에서 만났던 남자가 눈을 가렸던 천을 들고 서 있었다.
“비무장지대 안쪽에 있는 옛날 GP 막사요. 자주 끊기지만 아직 전기도 들어오고. 사방이 지뢰밭이오. 멋대로 건물 밖에 나갔다가는 산산조각 날 거요. 촌장이 부를 때까지 얌전히 계시오.”
말을 마친 남자가 밖으로 나갔다. 원담은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리자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잠들었던 원담은 제 숨소리에 놀라 깨어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방 가운데에 물병과 고구마가 놓여 있었다. 음식을 보자 허기가 느껴졌다. 배를 채우고 나자 다시 걱정이 몰려왔다.
‘촌장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내가 언제까지 정체를 숨길 수 있을까?’
초조하게 방안을 서성이던 원담이 문 손잡이를 살며시 돌렸다. 문이 열렸다. 원담은 조심스럽게 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마음대로 나다니지 말라던 남자의 경고가 떠올랐지만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야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질 것 같았다.
원담은 더듬더듬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복도 끝쪽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원담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문이 열린 방 안에서 나이 든 여자와 여러 명의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하자는 쪽과 할 수 없다는 쪽으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양쪽의 입장이 전혀 좁혀지지 않자 나이 든 여자가 상황을 정리했다. 한번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자고. 원담은 재빨리 그곳을 벗어나 자신이 있던 창고로 돌아왔다. 방안을 서성이던 원담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또다시 창고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던 방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원담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과 책장, 크고 작은 종이박스가 즐비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종이박스에는 온갖 분노의 욕설이 가득한 낱장 종이가 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우울하다는 하소연이 적힌 종이들, 그 옆에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의 종이들이, 그 옆에는 슬픔의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내용이 적힌 종이들이 가득했다. 마지막 박스에 담긴 검은색 겉표지 무더기를 보고서야 원담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헉, 이건 감정노트잖아!’
한 장 한 장 뜯어내서 비슷한 내용끼리 모은 감정노트였다. 원담은 감정에 중독될까 놀라 뒤로 물러서다가 벽에 붙은 책장에 부딪혔다. 책장에는 갱지를 묶어 만든 보통 노트들이 꽂혀 있었다. 원담은 한 권을 빼서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그건 감정에 대한 설명이었다. 어떤 느낌이었는지 어떤 상황에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그래서 신체 반응은 어땠는지, 다른 사람의 반응에 따라 뭐가 달라졌는지, 얼마나 계속되었는지, 어떤 단어와 문장이 떠올랐는지 등 감정에 대한 모든 경험과 정보들이 빼곡히 정리되어 있었다. 다른 노트들도 마찬가지였다.
‘감정노트를 뜯어 모으는 것도 수상한데 감정을 기록해? 안전촌이 아니라 미쳐버린 감정 숭배자들의 소굴인가?’
큰일이었다. 원담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때 뒤에서 나이 든 여자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역시 너였구나. 감정인이라고 하길래 닮은 사람인 줄 알았더니 정말 너였어. 시간이 지났어도 네 얼굴은 절대 잊을 수가 없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보던 원담은 놀라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당… 당신… 당신은…!?”
그녀가 온화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온화한 미소라고? 불가능해! 원담은 겁에 질려 결국 제 머리가 돌아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사람이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놀랄만하지. 난 서연의 쌍둥이 언니 서진이야. 내가 이 안전촌의 촌장이지.”
마을의 촌장인 서진은 감정노트를 만든 서연의 쌍둥이 언니였다. 서진은 서연과 달리 감정인이었다. 서진은 감정의 도태는 자연선택이 아니라 공멸 행위라고 말렸다. 하지만 서연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오히려 주제넘은 말 하지 말라며 열등한 종답게 순순히 도태의 운명을 따르라고 했다. 서연과 원담이 무감정 신인류의 세상을 만들겠다며 본격적으로 폭주를 시작하자 자신도 어느 날 도태될 수 있다고 판단한 서진은 믿을 만한 사람들과 함께 서울을 탈출해 강원도 산골에 작은 공동체를 꾸렸다. 주변에 숨어 있던 격리 구역 탈출자들이 모여들어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자 감정 정화군이 덮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렇게 비무장 지대의 옛 GP를 중심으로 지금의 보금자리를 꾸렸다. 서진은 어떻게 다시 감정인이 된 거냐고 원담에게 물었다. 원담의 설명을 듣고 난 서진이 중얼거렸다.
“이건 또 무슨 자연의 심술이야….”
원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서진이 입을 열었다.
“네 정체를 사실대로 알렸다가는 난리가 날 거야. 넌 용서받을 수 없는 변절한 히어로, 살인마 사령관이니까. 그렇다고 정체를 계속 숨겨 줄 수도 없어. 공동체의 신뢰가 깨지니까.”
서진이 잠시 말을 멈췄다.
“네 처분은 지금 진행 중인 일을 마친 다음 결정할 거야. 오랫동안 공을 들였는데 너 때문에 망치면 안 돼. 우리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생존이 걸린 중요한 문제니까. 유예 기간이 너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모르지만, 현명하게 처신할 거라 믿겠어.”
서진의 조건부 허락 하에 원담은 안전촌에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익혔다. 그 과정에서 서진이 말한 안전촌과 세상의 생존이 걸린 중요한 문제가 뭔지도 알게 되었다. 감정 중독 치료법이었다. 서진이 구상한 치료의 핵심 가설은 감정의 회복이었다. 서연의 연구를 옆에서 지켜보던 중 서진은 감정노트가 감정뿐만 아니라 기억까지 삭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감정이 기억과 연결되어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서연도 이 사실에 대해 처음에는 심각하게 생각했지만 곧 무시해 버렸다. 무감정인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부작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감정 중독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 과정을 살피던 서진은 감정 중독이 일어난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서진은 궁금해하는 원담에게 자신이 알아낸 것들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처음에는 호르몬 문제 일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게 아니었지.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 자체가 상실돼서 일어난 재앙이었어. 몸에 세균이 들어오면 면역이라는 방어 시스템이 작동해 세균을 막아내지? 농축된 감정에 대해서도 면역 시스템이 작동해야 되는데, 감정노트 때문에 감정과 연결된 기억이 상실되면서 감정 면역 시스템이 붕괴된 거야.”
서진의 설명을 들은 원담은 세균을 막겠다고 만든 무균실이 세균에 가장 취약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했다. 망가진 감정의 면역 체계에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니 뇌가 처리를 못해 엉망이 되면서 공포와 두려움만 남은 괴물로 변하게 된 것이 문제의 원인이었다.
“원인을 찾았으니 해결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원담의 질문에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해 낸 것이 ‘감정 백신 시스템’이야.”
‘감정 백신 시스템’이란 정체를 알고 있는 희석된 감정에 사람들을 노출시켜 면역 시스템을 재구축하는 방법이었다. 감정이 한꺼번에 유입되더라도 어떤 감정인지를 구분하고 이해할 수 있으면 공포와 불안이 비정상적으로 치솟지 않아 괴물로 변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 이 계획의 핵심이었다. 가설이 입증되면 감정 중독으로 죽는 일이 없어지게 되니 감정노트 때문에 엉망이 되었던 세상이 조금은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였다. 사람에 대한 실험이 불가피한데 실패하면 죽을 수도 있는 일에 기꺼이 나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전촌 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제비 뽑기를 해서라도 실험을 해야 한다는 쪽과 목적에는 동의하지만 누군가를 희생하는 건 반대한다는 쪽으로 나뉘었다. 이견은 쉽게 좁혀질 것 같지 않았다.
‘결론이 늦춰지면 내 명줄도 그만큼 늘어나는 건가?’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시간도 그만큼 늘어나는 셈이니까. 원담은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렵사리 잠이 들어도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자신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원담을 노려보기만 했다. 매일밤 같은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깬 원담은 다시 잠들지 못하고 밤새 머리통을 감싸 쥐고 끙끙거렸다. 날이 밝자 방에서 나온 원담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GP 막사 밖에 있는 실험실로 숨어들었다. 그곳에는 실험을 위한 장비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커다란 어항을 뒤집어 놓은 것 같이 생긴 장비 앞에는 여러 개의 밸브가 달려 있었다. 각 밸브에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분노’, ‘증오’, ‘슬픔’, ‘억울’, ‘죄책감’, ‘자책’. 원담은 밸브를 만지며 생각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다. 안 죽고 살아남으면 영웅이 되는 거고. 그럼 정체가 밝혀져도 살려주겠지. 이 방법 밖에 없다. 내 손으로 결론을 짓자!’
원담은 심호흡을 하고 ‘자책’ 꼬리표가 달린 밸브를 열고 장비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무감정인이 되기 전에 원담이 가장 많이 감정노트로 지웠던 감정이 자책이었다.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생각하게 되는 최악의 감정. 원담의 눈앞이 흐려지고 구역질이 올라왔다. 원담은 스스로에게 속삭이며 필사적으로 버텼다.
‘나는 쓰레기가 아니야! 내 탓이 아니야! 나는 나를 버리지 않아!’
원담이 필사적으로 버티는 동안 장비가 작동되는 걸 알아차린 서진이 사람들과 함께 급히 실험실로 들어왔다. 상황을 파악한 서진이 단호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어서 밸브 잠가! 그리고 모두 마스크 써!”
서진의 지시에 따라 연구실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비상 상자를 열어 그 안에 있던 마스크를 착용했다. 아무것도 쓰지 않은 감정노트로 만든 마스크였다. 감정노트 조각을 필터처럼 마스크에 끼우면 유출된 감정을 걸러내 몸 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막아준다는 걸 알아내고 만든 물건이었다. 마스크 착용이 끝나자 서진은 비상 버튼을 눌렀다. 환풍기가 돌면서 장비 안에 들어 있던 공기를 밖으로 날려 보냈다. 서진과 사람들이 장비 안으로 들어가 원담을 들쳐 매고 나왔다. 원담은 괴로워하며 경련하고 있었다. 원담이 열었던 밸브의 꼬리표를 확인한 서진이 원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니 탓이 아니야, 넌 충분히 잘 살아왔어. 너는 소중해, 소중한 사람이라고.”
서진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는 말을 따라 하라고 했다.
“니 탓 아니야, 넌 잘 살았어. 너는 소중해, 넌 멋진 사람이야. 널 믿어!”
원담을 둘러싼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 같은 말들을 쏟아냈다. 그 순간 원담은 제 의식 안에 갇혀 검은 타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살려고 몸부림을 칠수록 더 빨리 빠져들어갔다. 끈적한 타르가 집요하게 원담의 몸을 잡아당겼다. 목을 너머 입과 코가 잠기는 순간 원담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실제가 아닌데도 숨을 쉴 수가 없어 몸부림을 쳤다.
‘숨, 숨 막혀! 숨 막혀!’
그 순간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점점 또렷해졌다.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신기하게 몸도 가벼워지며 조금씩 타르 밖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소리가 커질수록 타르 밖으로 빠져나오는 속도도 빨라졌다. 다시 숨이 돌아왔다.
‘살고 싶어. 난 쓰레기가 아니야!’
원담의 몸을 잡아당기던 타르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물거리던 눈앞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원담은 크게 숨을 내뱉었다.
“잘 돌아왔어.”
서진이 초점이 돌아온 원담의 눈을 보고 미소 지었다. 함께 목소리를 높여 서진의 말을 따라 외쳤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버겁고 위태로운 생존만 가득했던 안전촌에 비로소 희망이 피어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