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감정 인류 본부 건물의 불 꺼진 복도 창문 너머로 도시의 야경이 뿜어내는 불빛들이 번쩍였다. 원담은 최대한 몸을 낮추고 서연의 집무실로 들어가는 문으로 다가섰다. 바닥에 숨겨진 키패드를 찾아 8자리 번호를 입력했다. 키패드 색깔이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출입 암호가 그대로였다. 육중한 문이 조용히 열렸다. 경호를 맡은 감정 정화군 중 누구도 달아났던 원담이 돌아와 침입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연의 집무실은 눈을 감고도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원담에게는 익숙한 곳이었다. 원담이 이곳에 숨어든 이유는 서연이 보관하고 있는 감정 제거 엑기스 레시피와 건물 지하에 있는 생산 설비를 폭파하기 위해서였다. 서진은 이 계획에 반대했다. 하지만 원담으로서는 이것만이 죗값을 치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 불행한 세상이 시작되도록 만든 것들. 그걸 없애는 것이 자연선택과 도태라는 이름으로 뒤집힌 세상을 다시 되돌릴 수 있는 출발점이라고 원담은 생각했다. 출입 암호가 그대로인 것을 보면 원담이 찾고 있는 레시피도 예전처럼 벽장 금고에 그대로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금고가 있던 자리를 더듬는 순간 방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고 익숙한 서연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감정 신인류가 타락해서 돌아왔네.”
서연은 늘 그렇듯 창을 등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 뒤로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원담은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서연을 겨누며 생각했다.
‘아, 함정이었구나. 어쩐지 여기까지 오는 길이 너무 순조로웠어.’
서연은 역시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너에게 기회를 한번 줄 생각이야. 무감정 신인류의 비전을 보여준 사람에 대한 나의 마지막 배려지.”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양손을 어깨 높이로 들고 원담쪽으로 다가왔다. 원담이 권총을 고쳐 잡고 겨누자 남자는 왼손에 들고 있던 작은 약병을 흔들어 보였다. 원담이 소파 테이블을 가리키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약병을 내려놓고 제 자리로 돌아갔다.
“그 엑기스 덕분에 모든 감정인이 이제 무감정 신인류로 새롭게 태어날 거야. 감정노트의 핵심 원료를 내가 개량했지. 마실 수 있도록. 이것만 있으면 네가 말했던 자연선택이 드디어 완수되는 거야. 도태가 끝난 완벽한 세상이 되는 거지. 이걸 마시고 열등한 감정에서 자유로워질 첫 번째 영광을 너에게 주마.”
원담은 남자가 놓고 간 약병을 쳐다봤다. 자유로워진다고? 무감정의 신인류로 살았던 시절 내가 자유로웠나? 감정을 없애기 위해 오히려 전전긍긍하며 얽매이지 않았던가. 그건 자유가 아니라 집착이었다. 있는 것을 없애는 퇴행이고 학살이었다. 원담을 약병을 든 채로 서연을 바라보고 말했다.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없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멍청한 짓을 했어요. 제멋대로 지워버린 감정이 세상을 망치고 있는데도 진화니, 자연선택이니 하면서 착각 속에 빠져 살았던 거죠. 감정을 없애는 건 자멸이었어요. 떼어낼 수 없는 부분을 억지로 떼어내서 버리려고 했던 거니까.”
서연은 지루한 서론을 듣는 표정으로 원담을 쳐다봤다. 어서 빨리 본론이나 말하라고 재촉하는 듯이.
“진짜 신인류는 감정이 없어서 모르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먹히지 않는 사람들이에요. 저는 그 사람들을 직접 봤어요. 그때 깨달았죠. 무감정이 자연선택이고 무감정인이 신인류이라고 생각하게 된 건 자연의 섭리 때문이 아니라 감정을 증오하다가 먹혀버린 나 자신의 뒤틀린 마음 때문이었다는 것을요.”
원담은 군복 재킷 주머니에서 리모컨을 꺼냈다. 감정 정화군 사령관 시절 건물을 통째로 날려버리기 위해 설치한 폭탄의 기폭장치였다. 서연을 비롯한 감정 제거 엑기스에 대한 모든 것을 적에게 넘겨주지 않고 한꺼번에 묻어야 할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서연은 역시 동요하지 않았다.
“넌 그걸 누를 수 없어. 무감정 인류였던 원담이라면 모를까. 이 건물 안에 많은 사람들이 있거든. 지금의 너는 그들을 절대로 죽도록 두지 못하지. 그리고 감정 제거 엑기스가 유출되면 차라리 지금 세상을 그리워하게 될 만큼 더 엉망이 될걸. 그래서 넌 절대 못 눌러. 하지만 나는 누를 수 있지.”
말을 마치는 동시에 서연이 책상 위에 있던 노트북의 엔터키를 눌렀다. 그 순간 집무실 곳곳에 설치된 스프링 쿨러에서 증기가 쏟아져 나왔다. 원담이 바지 주머니에서 감정노트로 만든 마스크를 꺼내 썼다. 서연의 목소리가 증기를 뚫고 들려왔다.
“물어!”
그 순간 검정 양복을 입은 남자가 바람처럼 원담쪽으로 달려왔다. 원담은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을 남자 쪽으로 여러 발 발사했다. 총성과 함께 매캐한 화약 냄새가 집무실에 가득 찼다. 남자가 가슴을 부여잡고 힘없이 쓰러졌다. 마스크를 쓴 원담도 현기증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여전히 책상 앞에 앉은 서연이 바닥에 쓰러진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를 담담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너에게 뭘 줄까 생각을 해봤어. 사령관으로 네가 했던 일들이 떠올랐지. 덕분에 선물을 고르는 게 수월해졌어. 이것도 최근에 감정노트에서 뽑아내서 정제한 신제품이야. 감정인들이 죄책감이라고 부르더군. 천천히 맛봐. ”
원담은 가물거리는 의식을 붙잡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안전촌에서 스스로 실험 대상이 되기 전에 밤마다 꾸었던 악몽이 생생하게 눈앞에 나타났다. 모든 것이 원담의 탓이었다. 자연선택과 도태를 명분으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 집무실 바닥에 쓰러진 원담의 몸이 격렬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서서히 죄책감의 늪으로 빠져들던 원담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너만의 잘못이 아니었어. 감정을 쉽게 지우려고 했던 우리 모두의 책임이니까.’
‘무너진 세상에 대해 책임을 지고 싶다면 정신 차려.’
‘비겁하게 죄책감 뒤로 숨지 마!’
‘용서를 구할 사람들 앞에 용감하게 나서라고. 그래서 죗값을 치르라고!’
그건 서진의 목소리였다. 아니 안전촌 사람들 모두의 목소리였다. 자세히 들어보니 원담 자신의 목소리였다. 경련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동시에 눈에 초점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원담은 안전촌에서처럼 감정 중독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만일을 대비해 서진이 학습시킨 다양한 감정 백신이 기대 이상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잠시 후 원담이 긴 숨을 내쉬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서연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는 원담을 바라봤다.
“넌 또 한 번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구나.”
원담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연에게 말했다.
“이 버튼을 눌러서 사람들이 죽으면 또 죄책감에 괴로워할지도 모르죠.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 선택의 무게를 감당해야 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할 수밖에 없어요. 이것마저 하지 않으면 감당조차도 할 수 없을 테니까. 불쌍한 당신은 죽었다 깨어다도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말을 마친 원담이 들고 있던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다.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건물 전체가 흔들거렸다. 거센 불길이 문을 부수고 서연의 집무실 안까지 밀려 들어왔다. 엄청난 열기에도 서연은 책상 앞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말했다.
“도태에 대한 저항인 거니? 아니면 너라는 교란종한테 우리가 도태당하는 거니?”
불붙은 천장이 무너져 내리면서 책상 앞에 앉아있던 서연을 덮쳤다. 크고 작은 파편조각이 감정 중독에서 미처 다 벗어나지 못한 원담도 덮쳤다. 쓰러졌던 원담은 힘겹게 일어나 휘청거리며 무너져내리는 비상계단을 통해 건물 밖으로 탈출했다. 파편에 맞은 원담의 머리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원담은 비틀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뒤쪽에선 크고 작은 폭발음과 함께 서연의 집무실이 있던 무감정 인류의 본부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격리구역의 주민들이 정화구역까지 몰려와 충격적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정 정화군과 무감정인들은 벌어지고 있는 일을 이해하지 못해 무기력하게 서 있었다. 원담은 큰길에서 벗어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눈앞이 흐려지고 온몸에 힘이 풀리고 있었다. 골목 안쪽에는 정화구역에 살고 있던 일가족이 서로를 꼭 끌어안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다가가자 원담을 알아보고 놀란 부모가 아이를 감싸 안고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이… 이 사람… 이 사람… 사령관!”
원담은 헐떡거리며 그들 옆에 주저앉았다. 아이가 엄마의 품에서 고개를 빼고 원담을 쳐다봤다. 아이 아빠가 원담의 앞을 막아서며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길가에 있던 보도블록을 집어 들었다. 여차하면 원담의 머리를 내려칠 작정이었다. 원담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아이를 안고 있던 엄마가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책 크기로 접힌 종이였다. 눈치를 살피던 아이 아빠가 원담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 보도블록으로 쓰러진 원담의 머리통을 내리치려는 순간 거리가 흔들릴 만큼 큰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놀란 아이 아빠가 보도블록을 떨어뜨렸다.
“무서워.”
폭발과 불길에 놀란 아이가 두려워하며 엄마 품으로 파고들었다. 쓰러진 원담이 숨을 헐떡이며 있는 힘을 다 짜내 머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헉, 헉, 저건… 무서운 게… 아니야. 저건… 기쁜 거야… 설… 설레는 거….”
원담의 머리가 말을 끝내지 못한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치를 살피던 가족은 재빨리 옆 골목으로 달아났다. 두 블록쯤 달아난 가족이 길가에 세워진 자동차 뒤로 몸을 숨겼다. 여전히 본부가 있던 방향에서 폭발음과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가족이 원담이 준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로 드러난 그 종이의 정체는 지도였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지도를 찬찬히 살폈다. 서울에서 시작된 화살표가 동해바다가 보일만한 강원도 어딘가까지 표시되어 있었다. 지도 옆에는 각 지역을 지날 때 조심해야 할 것들과 비상식량이 숨겨진 위치까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안전하게 그곳까지 갈 수 있는지, 얼마나 걸리는지도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곳에 도착하거든 촌장 서진을 만나 엉망이 된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배우라고 적혀 있었다. 아이의 엄마와 아빠는 그것이 소문으로만 들었던 안전촌으로 가는 지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은 주변을 살피며 격리 구역의 아지트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 지도만 있으면 아지트의 모든 가족들이 안전촌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 것이다. 아지트를 향해 걷는 세 사람의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지도를 주고 숨을 거둔 변절한 히어로, 냉혹한 살인자, 타락한 무감정 신인류가 남긴 어울리지 않는 말처럼. 두려움이 아닌 설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