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P병실에 추가 조명까지 설치해 원담의 눈을 집중적으로 촬영하던 회색 양복의 사내가 이번에는 카메라의 줌을 밀어 화면 안에 원담의 얼굴 전체가 들어오게 조정했다. 시선 관찰 다음은 얼굴 표정 관찰이었다.
“연인과 함께 처음 갔던 데이트 장소는?”
“없다. 연인이 없다.”
사내의 손 안에서 마우스가 딸칵 소리를 냈다.
“초콜릿이 박힌 아이스크림을 한 입 가득 베어 물었다.”
“달고 차가운 국물이 목구멍으로 흘러들어 가지.”
마우스가 또 한 번 딸칵 소리를 냈다.
“장마가 한창인 수요일 오후 에어컨이 고장 난 사무실.”
“부채질이 필요하겠군.”
사내가 누른 마우스의 딸칵 소리가 파닥이는 부채 소리처럼 원담의 귓속에서 울렸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원담은 자신도 모르게 그날 오후의 사무실을 떠올리고 있었다.
에어컨이 고장 난 오후의 사무실 안에는 불안과 짜증, 불쾌와 분노가 뒤범벅되어 있었다. 사무실 안으로 낯선 남자 한 사람이 들어왔다. 검은 양복을 입은 무표정한 남자는 성큼성큼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잠시 후 대표가 당황한 표정으로 방에서 나와 원담을 불렀다.
“원담 씨, 저분 따라가요.”
원담을 태운 자동차가 IT기업이 즐비한 수도권 신도시 고층 빌딩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주차장 한 구석에 있는 출입문 잠금장치에 카드키를 갖다 댔다. 철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 입구가 나타났다. 남자가 맨 꼭대기 층 버튼을 누르고 카드키를 갖다 대자 문이 닫혔다. 흔들리며 솟구치던 엘리베이터가 띵 소리와 함께 멈췄다. 문이 열리자 넓은 사무실이 나타났다. 사무실 벽에는 높은 서가들이 들어차 있었다. 통유리창을 등지고 여러 대의 노트북이 놓인 넓은 책상이 있었다. 그 책상에는 반백의 숏컷 스타일을 한 60대 초반의 여자가 흰 가운을 입고 앉아 서류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책상이 놓인 반대편에는 각종 전자 장비와 서류들이 즐비한 넓은 테이블이 자리 잡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여러 권의 감정노트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사무실 한가운데에는 족히 10인용은 되어 보이는 고급 소파 세트가 놓여 있었다.
“심해어에서 찾았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원담은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봤다. 여자는 원담을 쳐다보지도 않고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그 어둡고 춥고 척박한 곳에서 어떻게 버틸 수 있는 걸까? 그걸 알아내면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것 같았거든.”
원담을 데리고 온 남자가 방 가운데에 있는 소파에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여자가 비로소 보고 있던 서류철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담이 앉아 있는 소파 쪽으로 왔다.
“고생 끝에 아주 소량의 심해동물 엑기스를 얻었지. 그런데 담당 연구원이 실수로 연구 노트에 쏟은 거야. 귀한 연구 재료를 몽땅 쏟았으니 엄청난 실수였지. 하늘이 노래지고 죽고 싶을 만큼 절망스러웠대. 아무튼.”
여자가 소파의 상석에 앉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쫓겨날 거라고 생각한 연구원이 엑기스가 묻은 노트에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 거냐고, 이런 사고를 치다니 난 정말 재수가 없다고, 죽어버리고 싶다고 낙서를 했다지 아마. 그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나?”
원담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여자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원담과 여자 앞에 뜨거운 커피 잔을 내려놨다. 여자는 천천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상,쾌,해졌다더군. 죽고 싶고, 괴롭고, 불안해서 미칠 것 같은 감정이 순,식,간에 없어지더라는 거야. 뭔가 엄청난 것이 있다고 직감한 내가 연구원에게 그걸 파보게 했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감정노트’야. 세상에 내놓기까지 엑기스를 쏟은 날로부터 꼭 3년이 걸렸어.”
말을 멈춘 여자가 커피잔을 만지작 거리며 원담을 바라봤다.
“써봤어요. 시제품으로 나왔을 때부터요.”
원담이 사무실에 들어서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 그 회사에만 시제품을 뿌린 게 아니야. 군인, 경찰, 법관, 운동선수까지 다양했지. 모두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지. 다들 손쉽게 감정을 제거할 수 있어 일의 성과가 높아지고 효율이 좋아졌다고 만족했지. 누군가 그러더군. 오늘 이후의 역사는 감정노트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거라고. 이건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고 했어. 그게 어떤 기분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다들 그렇다니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할 밖에.”
원담은 처음 감정노트를 썼던 순간을 떠올렸다. 온몸에 가득 차 있던 절망과 분노, 우울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며 한 없이 투명해진 것 같았던 그 순간. 한 없이 투명해졌다고? 그게 어떤 거였지? 아무리 생각을 쥐어짜봐도 투명해졌다고 기억하는 그 순간의 느낌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처음 감정노트를 썼던 순간은 기억나요. 대단했어요. 그 느낌은 왠지 설명 못하겠지만.”
여자가 커피잔을 든 채 소파에서 일어서 창가로 걸어갔다.
“느낌을 기억 못 하는 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해볼까? 자네 질량 보전의 법칙이라고 알아?”
“고등학교 때 배웠던 것 같아요. 자세한 건 잊어버렸지만, 질량이라는 건 생기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뀌고 옮겨가는 거다, 뭐 그런 거 아닌가요?”
예전 같으면 틀릴까 봐 절대 대답 못했을 텐데 쫄거나 창피한 감정이 사라지니 거침없이 척척이다. 원담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여자는 창 밖을 내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맞아. 감정도 똑같아.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옮겨갈 뿐이야. 그러다 보니 사소한 문제가 생겼어. 감정노트에 모이고 모인 감정들이 보존 임계점을 넘어가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버린 거야. 늘어나다 늘어나다 결국 터져버린 풍선처럼. 무색무취에 물에 녹는 성질까지 있어서 더 쉽게 퍼질 수 있었지. 자네 회사 창고에 물이 새서 다 쓴 노트가 젖었다고 했지? 그래서 그 난장판이 되었던 거야.”
끔찍한 사고에 대해 말하는 서연의 목소리는 건조하다 못해 먼지가 풀풀 날릴 지경이었다.
“자네도 봤지? 감정에 중독된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감정이 몸속으로 흘러들어 가면 가장 먼저 구역질을 하지. 과식하면 토하는 것과 똑같아. 그러다가 중독된 감정이 뇌를 장악하기 시작하면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바닥에 쓰러져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지. 뇌가 중독된 감정에 완전히 장악되면 완충된 장난감 마냥 벌떡 일어서서 본능적으로 공포의 냄새를 따라 늑대처럼 달려드는 거지. 공포 냄새가 나는 머리와 목을 물어뜯어서 먹어 치우려고 말이야. 공포에 사로잡히니 다른 공포까지 증오하게 돼서 그러는 거야.”
서연의 말에 사무실에서 겪었던 상황들이 생생하게 원담의 눈앞에 떠올랐다.
“물어 뜯긴 사람 중에 공포에 취약한 사람들은 쏟아진 감정과 제 공포를 이기지 못해 숨이 끊어졌어. 견딘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똑같은 괴물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물어뜯으러 달려들고 말이야. 어떻게든 중독을 중화시켜 되돌려 보려고 해 봤는데 소용이 없었어. 한번 괴물이 되면 그걸로 끝이야. 괴물이 된 사람들을 처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단번에 숨통을 끊는 것뿐이지.”
잠시 말을 멈췄던 서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고생했어. 그 과정에서 자네를 알게 됐어. 대단히 인상 깊었지. 여기저기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을 때 자네 같은 사람이 있다면 수습하는 게 훨씬 쉬울 텐데 말이야. 그렇지?”
여자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를 돌아봤다. 남자가 여자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노트에 큰돈을 투자한 사람들이 사고가 세상에 알려지는 걸 막았어. 투자한 돈이 죄다 허공에 날아가버릴 테니까. 겁이 났겠지.”
여자가 다시 소파로 걸어와 같은 자리에 앉았다.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댄 여자가 원담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습할 일은 많은데 자네처럼 특별한 사람이 없어. 이게 본론이야.”
“특별요? 제가요?”
원담의 말을 듣고 있던 여자가 등받이에 몸을 파묻은 채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할 거냐는 표정이었다.
“무감정이지만 감정을 알고 있는 거.”
여자는 오른손 검지를 들어 원담을 지목하며 계속 이야기했다.
“감정이 유출된 현장만 치우는 게 아니라 중독 문제까지 조사하고 해결을 하려면 자네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하거든. 감정을 알지만 휘둘리지 않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초인! 자네가 바로 무감정의 히어로가 되는 거지. 감정이 쏟아져 난장판이 된 세상을 구하는.”
여자의 대답을 들은 원담이 또 한 번 질문을 던졌다.
“그 일 … 왜 해야 하죠? 이제 저는 감정과 아무 상관도 없는데…. 히어로 같은 것도 관심 없고요.”
여자는 탁자에 내려놨던 커피잔을 다시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세상 모두가 자네를 주목할거야. 영웅이라고 떠받들고 좋아할테지.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따위는 모두 잊고 말이야. 우리가 세상을 구할 거라고. 너저분한 감정으로 엉망이 된 이 세상을 말이야.”
“우리요? 어째서 우리라고 하는 거죠?”
“나도 무감정이야. 태어날 때부터. 그러고 보니 내 소개가 늦었군. 감정이 뭔지 궁금해서 인간의 감정을 평생 연구했지, 서연이야. 감정노트의 핵심 원료인 감정 제거 엑기스를 내가 만들었어. 그래서 정부가 감정 유출 사태의 수습을 내게 맡겼어. 그 일을 하려면 자네가 필요하다고.”
여자의 말이 끝나자 원담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사님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박사님이야 본인 일이니 나서는 게 당연하겠지만, 저는 제 일도 아닌 남의 일에 왜 나서야 하는지 여전히 이해가 안 되네요. 영웅? 히어로? 그래봐야 돌아서면 감정도 못 느끼는 새끼라고 손가락질하고 욕할게 뻔해요. 감정이 있을 때도 항상 그랬으니까요. 저보다 못난 것 같으면 가차없이 물어뜯죠. 그런게 인간이에요. 감정 없는 거, 사고를 수습하는 거 다 소용이 없어요.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그만 가볼게요.”
소파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는 원담을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가로막으려 하자 서연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때론 모르지만 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괜찮아. 그냥 데려다줘.”
원담은 서연에게 고개를 까닥해보이고 돌아서서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조용히 뒤를 따랐다. 쇼파에 앉은 서연은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홀짝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흥미로운 아이야... 오랫만에 호기심을 자극하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원담과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의 모습이 사라졌다. 서연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책상쪽으로 걸어와 보고 있던 서류 더비에 고개를 파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