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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비 Sep 18. 2024

신인류의 탄생

다음날, 어제저녁에 산 감정노트를 끌어안고 사무실에 출근한 원담은 메일 박스에서 깜박이고 있는 대표의 메일을 발견하고 클릭했다. 회식 공지였다. 메일을 열어본 모든 직원들이 제 눈을 의심했다. 비품 하나, 커피 한 봉지에도 유난을 떠는 위인이 갑자기 회식이라니. 아니나 다를까. 감정노트 개발사가 시제품 사용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저녁 식사에 초대한 것이었다. 직원들은 남의 돈으로 생색내는 대표의 쪼잔함에 대해 성토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는 공짜 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회식이 끝나고 술에 거나하게 취해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던 원담이 뭔가에 걸린 듯 크게 휘청거렸다. 균형을 잃은 원담이 계단을 굴러내려 가기 시작했다. 구르는 소리에 놀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달려왔다. 시야가 점점 좁아지던 원담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시 정신을 차린 원담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 어디야?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의사와 간호사들이 정신없이 오가는 것을 보니 병원 응급실이었다. 원담은 자신이 어젯밤 계단에서 굴렀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지만 마음은 평온했다. 출근 시간이 훨씬 지나 있는 것을 본 원담이 김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젯밤 계단에서 굴러 병원에 있다며 오늘 하루 휴가를 내겠다고 말했다. 김 과장은 괜찮냐는 안부 대신 이렇게 갑자기 무책임하게 입원을 하면 업무 펑크는 어떻게 할 거냐고 짜증을 퍼부었다. 김 과장의 폭언에도 원담은 아무렇지 않았다. 늘 중얼거리던 주문을 외우지도 않았다. 남의 일 같았다. 고요한 바다 깊숙이 들어와 있는 한 마리 고래가 된 것 같았다.
며칠간 입원했다가 다시 출근하던 날, 김 과장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며칠치의 폭언과 폭설을 한꺼번에 퍼부었다. 하지만 원담의 마음은 여전히 잔잔했다. 김 과장의 막말이 한쪽 귀로 들어와 한쪽 귀로 술술 흘러나가는 것 같았다. 원담이 아무 반응이 없자 폭언을 퍼붓던 김 과장이 오히려 제 분을 못 이겨 감정노트를 꺼내 들었다. 원담은 감정노트가 제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감정이 생기기도 전에 깨끗이 사라졌으니까. 자리로 돌아온 원담은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접수된 고객들의 불만 메일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비품 창고에 물이 새서 젖어버린 다 쓴 감정노트와 A4용지를 꺼내 카트에 싣고 있던 총무팀 이대리가 갑자기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웩, 웩!”
“어, 어 이대리, 이대리! 왜 그래?”
“으… 으….”

구역질을 하던 이대리가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바닥에 뒹굴기 시작했다. 몇몇 직원들이 놀라 이대리에게 다가갔다. 순간 이대리가 몸을 일으키더니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주변에 있던 직원들에게 덤벼들었다. 이대리에게 목을 물어뜯긴 최 과장이 소리를 질렀다.

“이대리! 왜, 왜 그래? 으악! 으악!”

사무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비품 창고 근처에 앉아 있던 또 다른 직원 하나도 구역질을 하며 바닥에 뒹굴다가 일어나 괴물처럼 소리를 지르며 다른 직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뛰어가며 원담을 밀치며 욕을 했다.

“비켜 이 새끼야!”

김 과장이었다. 김 과장이 사무실 문을 향해 달리자 눈치 빠른 몇 사람이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직원들도 사무실 문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먼저 나간 김 과장이 발작을 일으킨 사람들이 사무실 밖으로 나가면 절대 안 된다며 문을 잠근 것이었다. 사무실 안에 갇힌 사람들이 미친 소리 하지 말고 문 열라며 악을 썼다. 발작을 일으켜 괴물처럼 변해버린 직원들이 금세 여섯 명으로 늘어났다. 원담은 김 과장과 부딪힌 후 그대로 책상 밑에 주저앉아 있었다. 굳이 일어나야 할 이유가 없었다. 사무실에 갇힌 직원들은 괴물로 변한 직원들을 피하며 공포에 질려 울부짖었다. 괴물로 변한 직원들은 울부짖거나 숨은 직원들을 정확하게 찾아서 덤벼들었다. 마치 초정밀 레이더가 있는 것처럼 단숨에 찾아내 물어뜯었다. 불과 10여분 만에 울음과 비명, 괴성이 가득했던 사무실 안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간간히 괴물로 변한 사람들이 내는 으르렁 소리만 들렸다. 원담의 책상 옆으로 가장 먼저 괴물로 변해버린 이대리가 지나갔다. 반대쪽에서 또 다른 직원 하나가 다가왔다. 이대리도 그 직원도 책상 밑에 있는 원담을 알아 채지 못하고 지나쳤다. 원담은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김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과장님 이제 다 끝난 것 같은데요. 문 여세요.”
“미친 새끼야! 저 괴물들 있는 한 아무도 못 나와! 알았어!”

김 과장이 소리를 질렀다. 원담은 알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사무실 문 근처에는 이대리를 포함해 괴물처럼 변해버린 여섯 명의 직원들이 문 밖에서 풍겨오는 먹잇감 냄새를 맡고 모여든 맹수들처럼 서성이고 있었다. 다른 직원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었다. 원담은 회사 이미지가 엉망이 되든, 직원들이 죽든 살든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저 사무실 밖으로 나가 점심을 먹고 싶을 뿐이었다.

‘저 여섯 명만 없으면 사무실에서 나갈 수 있는 거지?’

문 근처를 서성대는 괴물로 변한 직원들을 빤히 쳐다보던 원담이 책상 밑에서 천천히 기어 나왔다. 괴물로 변한 여섯 명의 직원 중 누구도 원담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원담은 저들이 왜 자신에게는 덤벼들지 않는지 의아했다. 소리를 내서 부르면 어떻게 될까?

“저기요, 이대리님, 이대리님!”

원담의 부름에 괴물로 변한 이대리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건드리면 물려나?’

원담은 이대리 쪽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팔을 뻗어 으르렁대는 이대리의 오른팔을 살며시 붙잡았다. 이대리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물지는 않네. 그나저나 이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하지? 굴비처럼 묶을까? 창 밖으로 밀어버릴까? 아니면 좀비 영화에서 본 것처럼 몽둥이 같은 걸로 머리통을 박살 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두리번거리던 원담의 눈에 출입문 반대편에 있는 대회의실이 보였다.

‘일단 저기 몰아넣고 천천히 생각해 보지 뭐.’

원담은 한 손에 한 사람씩 괴물로 변한 직원의 팔을 잡고 회의실 쪽으로 끌고 갔다. 두 사람은 순순히 끌려왔다. 두 사람을 회의실로 몰아넣은 원담은 나머지 네 사람을 양 떼처럼 몰았다. 그들이 회의실로 들어가자 문을 잠그고 근처에 있던 책상을 끌어와 문을 밀고 나오지 못하도록 바리케이드까지 쳤다. 그리고는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쓰러져 있는 사람들 중 혹시 괴물처럼 변한 사람은 없는지 일일이 확인했다. 몇몇은 심하게 다쳐 정신을 잃었고, 몇몇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원담은 다시 김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과장님, 다 처리했어요.”
“무슨 개소리야 너! 내가 씨발…. 이리 주세요! 여보세요? 사무실 안에 계신 건가요?”

낯선 목소리가 김 과장의 전화기를 빼앗았다. 구조대원이라고 정체를 밝힌 사람이 사무실 상황을 물었다. 말로 설명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영상통화로 보여드릴게요.”

원담은 영상통화로 죽거나 다친 사람들의 모습과 괴물로 변한 여섯 사람을 가둬 놓은 대회의실을 보여줬다. 마침내 출입문이 열리고 구조대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원담은 사무실에 쓰러져 있던 사람들과 함께 병원으로 후송돼 진찰을 받았다.
꼬박 하루가 지나고 나서 원담을 담당한 의사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검사 결과에 대해 설명했다.

“감정을 느끼고 처리하는 뇌 부위에서 이상이 발견됐어요. 아마 더 이상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모르고 계셨나요?”

의사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설명을 이어갔다.

“괴물로 변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감정 호르몬을 감지해서 공격했던 것 같은데, 원담 씨는 그게 없어서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원….”

놀라운 이야기였지만 전혀 놀랍지 않았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 되다니. 원담의 머릿속에 과거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일진들에게 두들겨 맞고 실컷 놀림을 당한 뒤 길바닥에 누워 서럽게 울던 순간, 아무도 배웅해주지 않는 위병소를 혼자 쓸쓸히 걸어 나오던 제대날의 새벽, 제 잘못을 대신 뒤집어 씌우고도 뻔뻔하게 조롱하던 김 과장 때문에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부르며 깡소주를 마셨던 날. 괴롭고 슬프고 억울하고 비참한 기분을 없애기 위해 감정노트를 쓰고 또 썼던 날. 원담에게 감정은 고통이고 괴로움이었다. 삶을 망쳐버린 지독한 장애물이고 저주였다. 감정만 없었다면 원담의 삶도 지금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제 모든 것들과 안녕이다. 상상만 해왔던 일이 느닷없이 현실이 되었다. 앞으로 누군가의 비난에 마음 상할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위협에 두려울 일도 없을 것이다. 무서울 일도, 눈치 보며 불안해할 일도, 자책하며 쓰레기통에 스스로를 처박는 일도 없을 것이다. 아무 일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주문 따위는 더 이상 필요 없다. 남의 것이든 나의 것이든 어떤 기분과 감정에도 휘둘리지 않는 삶. 원담은 응급실 문을 나서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감정이 없는 인간이라… 감정이 없는 인간.”

실려 들어갈 때 기자들과 카메라로 북적거렸던 병원 앞마당은 거짓말처럼 텅 비어 있었다. 원담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터덜거리며 지하철 역을 향해 걸었다. 피곤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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